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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의 93년 한국의 인물 10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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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93년 한해는 改革과 司正으로 시종했다해도 지나치지 않을「激變의 시절」이었다.93년 한국의 각 분야를 주도했거나 상징할 10대인물로 꼽힌 인사들 대부분이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신선하고 과감한 변화와 개혁을 선도했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10대인물의 첫번째는 두말할 것도 없이 文民정부를 이끈 金泳三대통령.지난 2월25일『이제 곧 위로부터의 개혁이 시작될 것』이라며『다함께 고통을 분담하자』는 취임사로 변화의 메시지를 던진 金대통령은 30여년 軍人정치시대의 부조리와 적폐에 과감히개혁의 칼날을 들이대기 시작했고 이는 곧 사회 모든 분야의「개혁바람」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金대통령은 스스로 재산공개의 시범을 보여 의원.공직자의 재산공개를 유도,「윗물맑기」「깨끗한 정치」의 시발점을 마련했고 전격적인 금융실명제실시및 정치관계법의 혁신적 개정방향제시로 개혁의 양대 골간을 마련했다.
그는 軍정치개입의 상징이었던 하나회 장성들에 대한 경질을 단행하고 안기부와 기무사등 권력기관의 권한을 대폭 축소했다.『도도히 흐르기 시작한 개혁의 강물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역사의대세』(4.19묘역연설)라는 그의 인식은 결국 93년을 가장 정확히 요약한 말이었다.
金대통령의 개혁의지를 가장 가시적이고 흔들림없이 실현해나간 李會昌前감사원장(現국무총리)은「율곡사업비리」「평화의 댐」등에 대한 잇따른 감사와 全斗煥.盧泰愚 두 전직대통령에 대한 서면감사 강행을 통해『새 정부의 개혁엔 聖域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刻印시켰다.
軍은 물론 안기부.청와대에까지 감사의 성역이 없음을 강조하며감사원의 위상을「개혁의 先驅」로 자리매긴 李前원장은 개혁2기의총리로 임명돼 94년에 더욱 활약이 기대되는 인물로 부각되고 있다. 오랫동안 정치의 종속변수로만 여겨지며 통치권자의 눈치보기에만 급급할 수 밖에 없었던 경제계에서도 신선한 변화의 단초가 보이기 시작했고 그 주인공은 三星그룹의 李健熙회장이었다는 지적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같다.
『마누라만 빼고 전부 바꿔보자』『살아남기 위해 변해야 한다』는 변화의 지론으로「李健熙신드롬」이란 新造語까지 탄생시킨 李회장은 量.공급위주의 사고에 젖어있던 경제계에 質경영심리를 확산시키며 국제화시대에 기업이 나가야 할 방향을 선도적 으로 제시했다. 李회장은 실제 그룹의 7시출근.4시퇴근제와 불량품을 없애기 위한 라인스톱(조업중단)제개념,임원현장출근제 등을 과감히도입해 나갔고 생산효율혁신을 위한 사회기반시설(인프라스트럭처).복합화의 개념을 강조,21세기의 국가및 산업경영비전 을 선보였다. 權寧海前국방장관은 金대통령을 대리해 전.현직 4星장군만십수명을 문책하는 등 새정부 개혁의 요체인 肅軍작업을 지휘해 金泳三式 軍개혁의 선봉장역을 해냈다는 지적이다.그는 中央日報 鄭載憲기자 구속사건과 栗谷사업비리관련 의혹,동생의 무 기거래상금품수수사건으로 가장 퇴진요구를 많이 받은 장관으로 결국 해를넘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韓國版 피에트로검사」로 불린 洪準杓검사(서울지검강력부)는 그간 성역으로만 여겨졌던 슬롯머신업계의 비리에 도전,代父 鄭德珍을 4년간의 추적끝에 구속시켰고 그 후속타로「6共의 황태자」朴哲彦의원(국민당)의 팔목에 뇌물수수혐의로 수갑을 채웠다.
이와 관련,검찰내부의 비호세력으로 의혹을 받아오던 李健介 前大田고검장이 결국 구속되고 辛建법무차관.全在琪법무연수원장이 사직하는등 검찰내부의 自淨을 불러일으켜 검찰내부에선 은근히 미운털이 박히는 곤혹을 감수해야 했다.
민주화의 발걸음과 보조를 맞춰 문화예술계에서도 민족문화의 가치를 찾으려는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관객 1백만명을 돌파,최다관객동원기록을 수립한 영화『西便制』의 林權澤감독은 그 흐름을선도했다.
한국적 美人 吳貞孩양(劇中 송화역)의 구성진 남도가락을 통해한국의 情恨을 예술로 승화시킨 이 작품으로 林감독은 上海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프랑스의 유력일간紙 르 몽드는 그를『한국의 존 포드 감독』이라 극찬하기도 했다.
시민운동단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經實聯)의 徐京錫사무총장은 89년 經實聯창설이후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금융실명제가 전격 시행되자 샴페인을 터뜨렸으며,지난 9월 파국으로 치닫던 韓-藥분쟁의 중재안을 마련해 주무부처인 보사부를 무색케 했다.
徐총장의 經實聯은「깨끗한 정치모임」을 후원해 의원들의 자정노력을 도왔고 金昇淵한화회장의 비리혐의를 감사원에 고발하는 등 시민운동의 역할과 위상에 새 지평을 열었다.
10대 인물의 유일한 여성인사는 全敎組해직교사 복직의 주역이었던 丁海淑전교조위원장.丁위원장은『정부와 재야간에 타협은 없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해직교사의 전교조탈퇴조건을 수락하도록결단을 내려 4년여에 걸친 전교조문제해결의 기틀 을 마련했다.
丁위원장은『白旗를 들수 없다』는 조합원의 반대에 韓信이 짐짓가랑이 아래로 기어나간 故事를 들며「참교육을 위한 현장에서의 새출발」을 소신있게 설득,문민시대의 재야像을 신선하게 탈바꿈시켰다. 올림픽에 버금가는 행사임에도 불구,개혁바람에 다소 가려졌던 大田엑스포를 성공적으로 치러낸 吳明조직위원장은 21세기를맞는 국민들에게 과학기술심리를 불러일으켰다.1천4백만명의 최다관객,93일간의 최장기 대축제등의 기록을 남긴 大田 엑스포의 吳위원장은 유네스코가 뽑은「올해의 인물」로 선정됐고 대회이후 KBO총재로 발탁되자마자 다시 교통장관으로 入閣하게 됐다.
***UR태풍 쌀開放 십자가 반면 우루과이라운드(UR)의 거센 태풍속에 쌀시장 개방의 십자가를 져야했던 許信行前농림수산부장관은 연말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국익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주장에도 불구,야당과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퇴역당한 가장불운한 인물로 꼽혔다.
농민인 백부밑에서 자라 농고.농대를 거친 農政주무의 적임장관으로 기대를 모았던 許前장관이 냉해.추곡수매와 농산물수입개방의거센 삼각파도에 여지없이 무너졌던 모습은 격랑에 휩싸인 올 한해를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낸 한 사례였다.
〈崔 勳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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