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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재기르기 우월반(선진교육개혁:2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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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뛰어난 학생 1∼2학년씩 월반/하향평준화론 백년대계 망친다/학습지진아도 영재 못잖게 배려/자긍심 길러주며 특별수업 받게
미국에 이민와 로스앤젤레스 글렌데일에 살던 교포 조구용씨(44)는 83년 당시 다섯살 난 아들 마이클 조가 다니는 유치원 교사로부터 편지 한장을 받았다.
교사 폴라씨가 정성들여 친필로 쓴 편지는 「마이클이 매우 우수한 학생이니 곧바로 국민학교 2학년으로 진학시켰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는 「마이클은 수학은 국민학교 3학년 실력이고 읽기는 2학년 수준」이라고 월반이유를 설명하고 「부모님도 이 사실을 기뻐해달라」고 적고 있었다.
「학년을 뛰어넘어도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조씨는 걱정하면서도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선생님의 설득에 아들을 2학년으로 진학시켰다.
조씨의 걱정은 기우였다. 아들은 국민학교·중학교 과정에서 줄곧 수석을 놓치지 않았고 친구들과의 사이도 좋았다.
5년뒤인 88년 미국 볼드윈파크 교육구에서는 5명의 교육위원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 안건은 「마이클의 조기졸업」 문제.
볼드윈파크의 올리버중학교 컴비네이션(통합) 학급에서 공부한 마이클은 4­5학년 반에서 5학년,5­6학년 반에서 6학년 수준을 끝내고 7학년때 이미 8학년 과정을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올리버중학교에는 8학년 과정이 없었다. 교육위원 한명이 정서문제를 들어 반대했지만 결국 그를 9학년으로 진학시켜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두번째 월반과 다른 학교 9학년으로의 전학이 이뤄졌다.
마이클은 올해 만16세. 지난해 고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현재 MIT대 생물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며 대학원에서 의학을 전공할 계획이다.
『능력에 맞춰 가르치는 미국 교육제도가 아니었다면 마이클의 MIT대 입학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조씨의 말이다.
미국에선 영재를 매우 「귀하게」 여긴다. 일선 교사들은 어릴때부터 학생이 나타내는 작은 가능성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다.
우수하다고 평가된 학생들에게는 각종 영재프로그램 등 지원이 아낌없이 뒷받침된다.
영재로 소문난 마이클에게는 존스홉킨스대를 비롯,각종 영재교육기관에서 초청장이 쇄도했고 마이클은 중·고교때부터 여러차례 영재프로그램에 참가할 수 있었다.
「개성중시」. 미국·유럽 등 서구문화의 특징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개성중시 문화는 인성·능력의 다양성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하고 교육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 영재교육도 이같은 개성중시 문화의 교육적 표현이다. 우열반 편성,월반·조기졸업제도,예술고·과학고 등 특수영재학교 등이 특히 발달돼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영재들만 아낀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미국은 학습부진아·지진아들에 대한 교육에도 마찬가지의 「정성」을 기울인다.
『사람은 어차피 능력과 적성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능력이 다른 학생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똑같이 교육하는 것이야말로 비교육적인 것 아닙니까.』
○정서적 상처 없어
미국 케네디고교 카운슬러 교사인 교포 이춘배씨는 『미국 교육은 학생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돕지만 동시에 비록 능력이 좀 모자라더라도 스스로에 대한 존중·자긍심을 갖도록 북돋워주고 있다』며 『아이들은 성적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걸 배우며 이같은 「가치관」 때문에 우열반을 편성해도 미국 아이들은 한국 아이들처럼 정서적으로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뉴욕 PS 11국민학교(Public School 11). 평범한 공립인 이 학교엔 정규 교사와는 별도로 성적이 처진 학생들을 위한 3명의 보충수업 담당교사가 있다. 보충수업도 못따라가는 학생들은 2개의 별도학급에서 특별교육을 받는다.
특별반은 교육전문가가 학생의 능력·행동장애 등을 평가한뒤 부모의 동의를 얻어 실시한다.
결국 이 학교에는 학년마다 우수반·평균반·보충수업반·특별반 등 네가지 서로 다른 능력별 교육이 이뤄지는 셈이다.
고교도 마찬가지다. 특히 우수과목(AP:Advanced Placement) 제도는 대학교 1∼2학년 수준의 기초과목 20여개를 선택할 수 있게 한 것으로 우수한 학생들이 능력껏 학습진도를 나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해마다 하버드대 등 미국의 명문대에 전세계의 나이 어린 천재들이 몰려드는 것은 이처럼 영재를 소중히 여기는 미국의 교육풍토와 무관하지 않다. 영재교육에 열을 내는 것은 미국 등 선진국만이 아니다.
말레이시아·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들도 우수 인재를 키우려 안간힘을 쓰기는 마찬가지다.
○동남아국도 열성
말레이시아에서는 국민학교 2학년때부터 차별화교육을 실시한다. 우수학급은 매학년 진급 때마다 새로이 편성된다.
상급학교 과정을 배워도 될만한 우수학생은 교사가 지역 교육청에 월반 추천을 하며 교육청에서는 연말 추천된 학생들을 별도로 평가,통과하면 월반을 시킨다.
취재팀이 만난 한 호텔종업원은 『국민학교 2학년때부터 연거푸 월반한 우리나라의 열한살짜리가 지난해 하버드대에 합격했다』고 자랑했다.
전국민의 평균 교육기간이 5.2년으로 대표적 교육후진국이라할 베트남도 영재교육만으로 보면 「선진」이다.
어릴 때부터 우수한 영재들을 즉각 발굴,월반시키며 수준에 맞는 교육을 시키고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호치민시 구엔타이슨국민학교 교사 팜흥욤씨(36)는 『평준화는 인재를 썩여 국가발전을 가로막는 결과만 가져올뿐』이라며 『우리는 우수반제도가 운영된 뒤부터 국제과학·수학경시대회에서 입상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악평등주의,하향평준화­. 한국교육을 표현할때마다 등장하는 말이다.
한때는 월반제도도 있었고 영재교육을 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세계 제일의 교육열을 가진 학부모들은 『왜 우리 아이를 열반에 집어넣느냐』며 아우성쳤다. 우수반에 집어넣기 위해 교사에게 로비를 하는 학부모도 생겨났고 결국 우열반 제도는 폐지됐다.
『수업은 중간정도 실력을 가진 아이들 중심으로 할 수밖에 없어요. 우수한 아이들은 지루해하고 실력이 모자라는 아이들은 그것마저 어려워하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죠. 모두에게 별 도움이 안되는 하향편준화인줄 알지만….』 K고 서모교사의 말이다. 학부모들의 잘못된 교육열,그저 비난받지 않기만을 바라는 교육당국의 면피주의 등 교육 외적인 요인들이 교육자체를 말살하고 있는 것이다.
○나이집착 버려야
점수만으로 인간을 평가하고 학벌만을 앞세우는 우리의 교육현실에선 우열반이 많은 문제점을 지니는 것도 사실이다. 능력보다 나이가 우선인 한국적 문화도 단단히 한몫 거들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같은 악평등주의를 고집할 수는 없다. 개인적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국경이 무너진 시대에 국제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하향평준화 교육은 이제 재고돼야 할 때다.<이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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