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광장>지옥의 신도림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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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연로하신 선생님이 우리집에 오시는 날,선생님을 수행하는(?)친구와의 사전통화가 있었다.선생님은 江南이시고 나는 구로구 港洞(아시는지요? 항동의 그린빌라를)이다.어디 감히 구석진 항동에서 선생님을 오시라 할수 있는지 송구스럽기 짝이 없었다.
친구의 걱정은 잠실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모시는것까지는 좋으나 인천방향으로 가는 1호선 국철을 바꿔타는 신도림역부터가문제라는 것이다.
아!「지옥의 신도림역」.
내 어찌 그과정에 무심할수 있었겠는가.그러나 비장한 어조로 내 진심을 말했다.선생님을 모시는 프로그램중 빠뜨리면 안되는 것이 바로 그 신도림역이라고.그곳은 나의 작가적 의식이 가장 맹렬히 발동하는 전쟁터였다.서민들의 삶에 계절도 시간도 타지않고 속수무책으로 미어 터지는 곳.
대통령이 정치를 망치는게 무엇인가.보리밥 먹던 시절 다 잊어버리고 황금방석의 안일에 묻힐 때이다.기염을 토하다가 우리는 말을 못맺고 한바탕 웃었다.
존경하는 선생님께,악동같은 우리들이여.그러지 않아도 선생님은작가적 젊음이 얼마나 유별나신 분인데.우리보다 더 일상의 불편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분.『버스타면 어때요.나는 그게 더 좋아요.』등등.이미 성공하여 높고 풍족하게 사시는 작가.그럼에도 대중적 일상을 낯설어하지 않고 기꺼이 즐기시는 원로.
사실 내 가슴은 선생님의 작고 마른 체구가 신도림역에서 압축되고 짓이겨질 생각을 하면 고통스럽기 그지없었다.그래도 그것이나만의 사랑인양 억지를 부리니 이 무슨 불충인가.정말 아무도 선생님께 그렇게 하진 못할 것이다.선생님 용서하 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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