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과학교실(선진교육개혁: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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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꿈을 심는 과학박물관/불 라빌레트 한해 6백만명 관람/미선 대통령이 스미소니언 위원/불,정부서 매년 수백억원 지원/서울과학관 15년간 장비도입 전무
국교때 세계 수위를 달리던 우리의 과학실력은 중·고교로 가면 중하위권으로 처지고 만다.
해마다 피를 말리는 악명높은 입시전쟁을 치르고,어렵게 대학 들어가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지만 아직 노벨과학상 후보 근처에도 못가봤다.
우리는 아직도 과학교육은 교실안에서나 하는거라고 생각한다.
런던시내 사우스 캔팅턴 과학박물관 2층 플래스틱 전시관.
스틸군(11)은 진열대 앞에 달린 인터폰을 들고 뭔가 열심히 메모하고 있었다. 기자가 또다른 인터폰을 들자 설명이 흘러나왔다.
『의치제작 과정입니다. 의치의 재료는 합성수지라 불리는 플래스틱이지요. 수출용뼈·콘텍트렌즈·테니스라켓 등 수많은 물건들이 플래스틱으로 만들어집니다. 1826년 알렉산더 파크씨가 발명했어요.』
인터폰은 5분여동안 플래스틱의 발전과정·다양한 용도와 플래스틱으로 만들어진 물건 등 플래스틱에 관한 모든 정보를 쉴새없이 전달했다.
인터폰옆 모니터는 설명에 맞춰 자료화면들이 계속 바뀌고 있었다.
『특수용도로 사용되는 플래스틱을 알아오라는 학교숙제 때문에 왔어요.』
메모하던 스틸군의 말이다.
플래스틱관의 갖가지 전시물들을 다 살펴보려면 적어도 4∼5시간은 걸리지만 플래스틱에 대해 백지였던 사람도 나올 때는 누구나 「박사」가 될 수 있다.
농업·가스·유리·철강·기후·통신·화학공업·컴퓨터·해양공학·빛·핵물리·석유·인쇄출판·전기와 자석·광학·의학·우주관…. 현대과학기술 전체를 총망라한 이 과학박물관의 40여개 전시관은 그 자체가 「교사없는 교실」이다.
대부분의 전시물엔 실물크기 마네킹이 실험하는 모습,기관을 작동시키는 장면을 생생히 재연해 현장감을 주고 인터폰 설명을 들으며 모니터를 쳐다보면 과학지식은 저절로 머리에 들어온다.
박물관 각층에 놓인 둥그런 탁자에는 단체견학 온 학생들이 교사와 함께 과학에 관해 토론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곳곳서 즉석토론
1층 우주과학관. 우주항공의 발달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각종 전시물 사이엔 69년 달에 다녀온 진짜 아폴로 10호가 전시돼 있다. 우주에 대한 중요성과 탐구심을 일깨우고 자극을 주기위해 미 항공우주국(NASA)으로부터 직접 사온 겁니다.』 안내원의 설명. 우주산업에서 다른 선진국들에 뒤진 영국이 미래를 위해 놓고 있는 포석이다.
프랑스 파리의 라 빌레트(La villette). 서울 여의도의 6분의 1 크기인 55만평방m에 76년 착공돼 20년 대역사의 완공을 눈앞에 둔 과학과 문화의 복합마을이다.
『과학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고 지식에 대한 기쁨을 주는게 목적입니다. 92년 한햇동안 6백여만명,하루 2만여명이 찾아와 과학을 즐겼지요.』
프랑스정부는 라 빌레트의 연간 운영비 1천1백억원중 7백억원을 지원하고 있다. 나머지 4백억원은 라 빌레트 자체의 연구용역 수입·입장료 등으로 충당된다.
『정부 부담이 크지만 프랑스 어린이들이 이곳에서 배우는 과학정신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겁니다. 관람객의 25%는 외국인이니 국력신장에도 큰 도움이지요.』 파퐁씨의 말이다.
라 빌레트가 방학 때마다 6∼18세 학생들을 상대로 여는 과학학교는 언제나 성황이다. 올해엔 지금까지 1백66개 국·중·고 학급들이 과학학교에 참가했고 이중 15개 학급은 외국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사회교육장 역할
영국과 프랑스 과학박물관의 공통점은 관람객들과 끊임없이 교감하는,「살아있는 박물관」이라는 것이다. 전시물마다엔 어떻게 하면 과학에 흥미를 줄 수 있을까를 고심한 흔적이 곳곳에 배어있다.
『한국박물관은 사회교육기능이 전혀 없는 후진형입니다.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전시에만 그치면 그건 죽은 겁니다.』 기자는 미 스미소니언 박물관 수석학예연구관 앨런 배싱 박사가 91년 한국박물관을 보고 내렸던 혹평이 떠올랐다.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 건너편에는 스미소니언 박물관이 있다. 각각 세종문화회관 크기인 자연사박물관·항공우주박물관·국립미술관·미국역사박물관 등과 그보다는 좀 작은 4∼5개의 건물들이 우뚝우뚝 이어진,미국의 자랑거리중 하나다. 1846년 영국 화학자 제임스 스미스손의 유지로 지어진뒤 1백60년간 새 건물들이 계속 들어서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대통령·부통령·대법원장은 취임과 동시에 박물관 위원이 되고 부통령·상하의원·연방판사로 운영위원을 구성할만큼 미국이 이 박물관에 쏟는 애정과 자부심은 대단하다.
박물관에 소속된 수백명의 박사들이 발표하는 각종 연구성과는 웬만한 대학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높은 수준의 것들이어서 스미소니언이 박물관인지,교육기관인지를 의심케할 정도다.
학생들을 단체관람시키려면 교사는 반드시 몇달전부터 박물관측과 편지를 주고받아야 한다. 그저 구경이나 하다 돌아가지 않으려면 무엇을 가르치고 어디를 관람할지 미리 상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가. 서울 종로구 와룡동 서울국립과학관­. 인구 1천만명이 넘는 수도 서울의 유일한 과학전시관이다. 「전국민의 과학화」를 모토로 64년 개관할 당시만해도 대지 3천3백평,건물 2개동으로 이뤄진 쓸만한 곳이었고,고 박정희대통령의 과학기술인력 육성방침에 따라 한때는 견학학생들로 붐볐다.
○대전 과학동산 기대
그러나 전국민의 과학화가 일장춘몽으로 끝났듯이 이 과학관도 죽은 곳으로 변해버렸다. 4급 서기관인 장관부터 기능직을 모두 합쳐 직원이 34명인 이 과학관은 78년 일부 기업으로부터 구닥다리 전시물 몇개를 기증받은뒤 지금까지 15년간 첨단과학장비를 단 한점도 새로 들여놓지 못했다.
『장비를 지원받아도 이젠 관리능력이 없습니다.』 과학관측의 고백이다.
동네 사설전시관 수준에 불과하지만 그나마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올해에도 30만명이나 관람했다. 하지만 관람객의 대부분은 유치원생들이었다.
어려서는 똑똑한 우리 아이들이 나이가 들수록 실력이 떨어지는건 어쩌면 당연하다. 우리 아이들에게 부족한건 머리가 아니라 기성세대의 세심한 배려와 과감한 투자였다.
다음세대에도 우리 아이들은 잘하면 중진국,그도 안되면 후진국 국민으로 살아야 한다는건 단순한 호들갑이나 기우가 아니다.
금년은 과학의 해다. 대전엑스포는 국민들에게 과학마인드를 심어줬다는 점에서 크게 고무적이었고 6개월뒤에는 그 자리에 과학동산이 지어진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그러나 스미소니언 박물관 배싱 박사의 지적처럼 중요한건 단순한 전시가 아니다. 이제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쓸만한 과학관을 지어주고 과학과 미래를 심어줄 때다. 세계는 지금 과학전쟁에 돌입했고 우리는 늦어도 많이 늦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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