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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경기민요 준보유자 이춘의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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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영화『서편제』로 새삼 판소리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이 뜨겁다.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므로 마땅히 좋아해야 한다는 차원을 넘어 진정 우리 전통음악의 참맛을 알고자 하는 이들이 차차 늘고 있는 것이다.하지만 자칫 한 영화의 열풍으로 인해 국악에 대한 관심이 판소리에만 편중,다른 우리 민요들의 뛰어난 점들이간과되지 않을까 두렵다.
판소리와 더불어 수천년 이 땅의 백성들에게 최고 인기를 누려온 대표적인 대중가요가 민요다.지방마다 특유의 풍습.생활속에서자연스럽게 형성돼온 민요는 생생한 표현력과 풍부한 음악성으로 듣는 이로 하여금 흥과 신명을 돋워준다.크게 보 아 경기민요.
서도민요.남도민요로 나누어지는 민요는 좁은 이 땅덩어리 안에서어찌 그리 지역에 따라 창법이나 선율이 확연히 다른지 자못 놀랄 뿐이다.
『판소리와 연관이 있어서인지 무게가 있고 뱃속에서 끌어올리는통성을 주로 사용하는 남도민요와 달리 경기민요는 목을 많이 사용합니다.곱고 예쁘게 나가다섬세하게 떨고,끌어당기고 죄는 목을위주로 하기 때문에 무척 힘이 들지요.』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준보유자 명창 李春羲씨(46).그는 민요를 하는 명창들이 대개 그러하듯 고운 자태에 비해 삭힌목소리로 30여년오직 得音을 위해 수도승처럼 지내온 자신의 소리 내력을 말한다. 그는 해방 이듬해 서울 한남동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그 자리를 맴돌고 있는 서울 토박이다.밭농사를 업으로 하던 집안의 5남매중 셋째였던 그는 깡동치마에 책보자기를 둘러메고 소학교에 다니던 가난하고 배고팠던 국민학교때까지만 해도 그 시절 누구나그랬듯이 그저 평범한 해방둥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부친이 어렵게 장만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민요 가락을 듣곤 소리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가슴 깊이 병으로 쌓아간다.
노래를 하겠다며 학원에 보내달라는 그의 보챔을 부모는 대매로잡도리하며 막무가내로 막았다.하지만 그는『사발가』『창부타령』『이별가』등을 들으며 어떻게 하면 저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를 지고새우며 꿈꾸었다.그러던 그는 끝내 15세때 소리에 대한 병이 깊어 몸져 누웠다.백약을 다 써보고 한 주일간은 아편까지 대보았지만 그때뿐 좀처럼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그의 부모는 끝내 그를 용하다는 의원(?)에게 보였다.의원은 고개를 내두르며『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게 하라』 며 돌려보냈다.
『인간문화재 이창배 선생이 경영하던 청구고전성악원에 입학했어요.골방에 장구 하나가 고작이었지요.하지만 선생께서는 정말 열과 성을 다해 소리를 가르쳤습니다.』 요즘처럼 악보가 있을리 없던 시절 그는 오직 口傳心授로 스승의 소리를 되풀이 따라 할수밖에 없었다.이창배 명창은 조선총독부에 측량기사로 근무하면서도 낮에 일하고 밤새워 소리를 익힌 타고난 소리꾼으로 당대 최고였다. 그는 그로부터 경기민요 12잡가의 기초를 닦았다.잡가라 하면 잡스런 인상을 주지만 판소리의 마당과 같은 의미다.즉유산가.적벽가.소춘향가.선유가.집장가.형장가.평양가.제비가.달거리.십장가.출인가.방물가를 일컫는다.10년은 해야 겨 우 소릿귀가 뚫린다는 12잡가를 그는 유달리 빨리 익혔다.타고난 재질이 한몫 했겠지만 골방에 갇혀 피나는 훈련을 거듭한 야멸찬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는 69년 전국민요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명창의 대열에 끼게 된다.그리고 75년 경기민요 기능 보유자인 안비취 선생의 전수장학생으로 들어가 5년후인 80년 이수자가 된다.
민요는 다른 국악보다 부르기 쉬워 많이 애창되는 반면 뛰어나게 잘 부르기란 매우 힘든 양면성을 가진 아주 깊은 예술이다.
그는 소리공부를 하다 막히면 강원도 회령산 보룡계곡으로 들어가곤 한다.
화전민이 버리고 간 외딴 통나무집에서 천강대의 약수를 받아 마시며 한달여 죽을 각오로 소리공부에 매달린다.목이 완전히 부어 헛김마저 내쉬기 힘들 때쯤 산을 내려오지만 얼마후 허기를 채워야 하듯 또다시 산을 찾는다.그만큼 항상 자신 의 소리에 부족함을 느끼고 이를 메우려 하기 위함이다.
그를 가르친 안비취 명창은 이제 노령으로 거동조차 불편한 몸이 되었다.한평생 경기민요를 전승하기 위해 헌신했던 그다.스승의 전승 의지를 그대로 물려받은 그는 소리를 원하는 곳이면 어디를 막론하고 달려간다.스승의 소리가 그러했듯이 그 역시 진중하다는 평을 듣는다.스승은 그에 대해 많은 노력으로 노련한 기교를 갖고 있는데다 美聲으로 민요의 맛을 더욱 돋워주고 있다며만족해 한다.
그는 서른이 넘어 살림을 차렸다.그러나 잦은 공연과 방송 출연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던 그는 원만히 가정을 꾸리기가 쉽지 않았다.그는 평생 뜻을 세웠던 민요를 버릴 수 없어 끝내살림을 그만 뒀다.
그는 요즘 더욱 바빠졌다.「이춘희민요연구소」를 세워 후진 양성에 열중하는 중에도 시간을 쪼개 중앙대.서울예전 국악과 강의에 임하고 있고 멀리 大田의 주부모임에도 나가 민요를 가르친다. 그는 소질은 있으나 돈이 없는 학생들이 있으면 손수 거둬 용돈을 주어가면서 소리공부를 시킨다.뼈를 깎는 고생에 비해 3류 대중가수보다 초라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게 국악의 현실이지만그다지 연연해 하지 않는다.본래 소리채를 바라고 시작한 민요가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自興에 겨우면 주머니가 비었어도 마냥 즐겁다는 그는 외딸에게도 경기민요의 대를 잇게 하고 있다.한국적인 것이 곧 세계적이라는 그는 국악의 해인 내년엔 카네기홀에서 공연할 계획이란다. 〈李順男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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