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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마사회장-5.16후 육사출신이 독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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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한국마사회장은 낙하산훈련을 잘 받은 공수부대 출신이라야 한다.』 낙하산인사의 전형으로까지 불리는 한국마사회장 자리를 놓고 항간에 나도는 말이다.
경마라는 것이 아직은 일반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사회장도 스폿라이트를 받는 화려한 자리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마사회의 지난해 총매출규모가 무려 1조원에 육박할정도로 웬만한 대기업과 맞먹고,더구나 1백% 현금장사를 하는 알토란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알면 얘기가 달라진다.
따라서 마사회장이란 자리는 정치권의 입김이 상당히 많이 작용해온 역사를 갖고있다.
지난 45년 광복이후 한국마사회장을 지낸 18명의 면면을 보면 말과 관계있는 사람은 승마인 출신인 초대 羅明均회장과 4,9대회장을 역임한 李載侃회장 정도일뿐이다(8대회장인 金熙淑회장은 마사회 이사 출신으로 유일한 내부 승진 케이스 로 볼수 있으나 4.19이후 과도기의 마사회를 회장서리 자격으로 7개월간임시로 맡았다).
머지 회장은 대부분 경마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사람들로 자유당시절에는 자유당 현직간부가, 5.16이후 군사정권아래서는 육사출신 예비역장성들이 30년 넘게 자리를 독차지했다.
5.16직후인 61년7월 육사1기인 韓永周 예비역 육군준장이10대 회장에 오른 이후 지난달 물러난 24대 成鎔旭회장(육사15기)에 이르기까지 무려 32년간 마사회장직은 「별들의 행진」으로 이어졌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군출신이 배제되고 씨름인 출신으로 전직국회의원인 현 吳景義회장이 임명됐으나 吳회장 역시 YS인맥이라는 점에서는 여전히 정치권의 입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받고있다.
마사회는 큰 덩어리의 현금이 오고가는 현실때문에 초창기부터 경마장은 깡패들의 온상,정치자금 조달기관,공금횡령사건,경마부정사건등 온갖 구설수에 오르면서 伏魔殿의 대표격으로 거론됐다.
이에따라 마사회장은 크고작은 구설수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자유당 중앙당 조사부차장으로 있다 54년 제6대 마사회장으로 취임한 金盛光회장은 후임회장에 의해 업무상배임혐의로 고발당해 구속까지 됐다.
金씨는 총무부장.경리과장과 짜고 2중장부를 만들어 공금 2천만환을 횡령하고 4천만환을 탈세하는 사고를 저질렀다.
이후 마사회는 이미지 쇄신을 위해 노력해왔으나 아직까지도 새로 취임하는 회장의 제일 큰 과제가 「공정경마 구현」이라는 사실에서 마사회가 안고있는 고민을 알수 있다.
또 공정경마를 위해 노력했던 23대 柳承國회장과 24대 成鎔旭회장이 각각 경마부정사건과 경마장 난동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3년 임기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채 똑같이 1년만에 물러난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마사회장이 외풍을 타는 자리라는 것은 초대 羅明均회장이 45년11월 미군정아래에서 군정장관인 아널드소장으로부터 임명받았다는 역사적인 사실에서부터 기인한다고 볼수 있다.
일제하인 28년부터 조선마사회 산하 경성승마구락부에서 승마를즐겼던 羅회장은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조선마사회를 인수하는데 주역을 담당했다.
일본인들로부터 인수한 조선마사회의 규모는 남북한에 걸쳐 9개경마장과 사택등 방대한 것이었다.
정부수립과 함께 한국마사회가 농림부 산하로 들어간 이후 2대徐廷惟회장과 3대 金安基회장은 농림부장관이 바뀌면 물러나는 운명을 겪으면서 각각 7개월과 10개월의 단명으로 끝났다.
明均회장과 함께 조선마사회 인수에 공이 컸던 4대 李載侃회장은 승마인 출신답게 마사회 발전을 위한 의욕적인 계획을 세웠으나 6.25라는 장벽에 부닥쳐 좌절하고 말았다.
전쟁이후 폐허가 된 이땅위에 뚝섬경마장 시대를 연 이가 바로5대 金宇卿회장이다.金회장은 53년 채소밭이던 뚝섬에 경마장을신설키로 하고 공사를 시작,드디어 54년에 개장함으로써 35년간의 뚝섬시대를 개척한 공로자다.
그러나 당시에는 조랑말 경주가 고작이어서 적자가 누적될 수밖에 없었고 행정부의 모든 부처에 자유당의 입김이 강해지던 54년10월 외압에 의해 회장직을 내놓아야 했다.
자유당에 의해 회장자리에 앉은 金盛光회장은 李起鵬국회의장을 마사회 고문으로 추대하는등 자유당 세력을 등에 업고 마사회를 키우려했으나 뜻대로 되지않고 오히려 횡령사건으로 구속됐다.
7대 金永瑾회장은 조교사와 기수를 동원,「李承晩 4선 지지」기마데모를 벌이는등 전형적인 정치회장의 모습을 보였다.
5.16직후 10대회장에 취임한 韓永周회장은 당시 부조리를 척결하자는 사회분위기와 군출신다운 발상에 따라 마사회직원 80명중 3명만 남기고 모조리 해직시키려 했었다.
그러나 그럴 경우 경마시행 자체가 어렵다는 주위의 만류로 핵심요원 20명을 남기고 60명을 해직시키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63년부터 70년까지 11~13대를 연임한 金德勝회장은 중화민국 육군소령 출신의 민간인 신분으로 5.16에 참여한 공로로한국권투위원회 회장을 거쳐 마사회장에 취임했다.金회장은 적자에허덕이는 마사회를 살리기 위해 공영제를 시도했 으나 관심부족으로 실패하자 사재를 털어 시설에 투자하는등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최근의 법인마주와 같은 덕마흥업을 창설,마사회와 미묘한 관계에 빠지기도 했다.
덕마흥업은 시설투자와 함께 66년 일본으로부터 경주마를 도입,마사회에 임대하는등 열악한 환경의 마사회를 크게 도왔으나 나중에는 경주마를 제공하지 않아 경마를 중단케하는등 분쟁을 일으켰다. 71년 15대 회장에 취임한 金東河회장은 특유의 밀어붙이기 스타일로 덕마흥업을 반강제로 인수,단일마주제를 확립했다.
***5 共출범이후인 82년1월 취임한 李建榮회장은 세번을 연임하며 만10년을 재임한 최장수 회장이다.
12.12에 반대,군복을 벗은 李회장은 5共정권이 회유책으로마사회장에 앉힌 케이스.
그러나 일단 자리에 앉은 이후에는 과천경마장을 건설,과천시대를 개막한 주인공이 됐으며 일하는 회장으로 평가받았다.
뒤를 이은 柳承國회장은 부정경마를 뿌리뽑기 위해 분쟁이 잦은민간인 TV경마장을 폐쇄하고 마사회에서 직영하는 방안을 추진하는가 하면 개인마주제 실시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으나 92년9월 8명이 구속되고 조교사 2명이 자살하는등 사상 최대규모의경마 부정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1년만에 물러나야 했다.
또 成鎔旭회장 역시 임기중에 역사적인 개인마주제를 실시하고 선진경마를 위한 장기대책을 마련하는등 의욕을 보였으나 공직자 재산공개에 따른 물의와 경마장 난동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1년만에 불명예 퇴진했다.
역대회장 18명중 3년임기를 제대로 채운 사람이 6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바람을 많이 타는 한국마사회장 자리.마사회 관계자들은 한국경마가 제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앞으로 정치권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서 경마에 식견을 가진 사업가나 행정가가 회장에 올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孫長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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