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이쓰는가정이야기>술 안먹기와 단골손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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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아범이 요즘 얼마나 큰소리를 치는지 말도 못해요.꼴보기 싫어요.』 지난주 아버님 생신날 내가 샛잠을 자고 있는데 들린 소리다.아랫동서와 어머니 앞에서 투덜거리는 소리인데 이야기인즉술 안먹는 일밖에는 집에 잘해주는 것도 없으면서도 폭군처럼 큰소리 치며 산다는 아내의 불평이다.요즘 새로 만나는 사 람은 느닷없이 술잘먹게 생긴 사람이라는 표현을 한다.하긴 술 참 잘먹던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술잘하게도 생겼다 싶다.친구들은 아직도 술한잔 하라고 권하기도 하는데 아직은 술안먹어야 하는 나와의 약속 때문에 손을 안대고 사이다나 생 수.커피를 술대신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정신없이 술을 마셔대던 내가 술안먹기를 결심한 것은 89년말.그러니까 올해를 넘기면 5년째로 접어드는 셈인데 정부의 심야영업 금지조치가 발표되자 농담삼아『이 조치가 흐지부지되면 그때부터 술마시겠다』고 한것이 오늘까지 이어진 것이다 .
행정당국의 무슨 조치 운운하면 대체로 3개월이면 뱀꼬리가 되곤 했기 때문에 좋아하던 술도 백날정도 참으면 그때가 오려니 했던 것인데,이 조치만은 영 아닌 것같아 걱정된다.숱한 술친구들이『혹시 간이 아니냐,마누라가 이악스럽게 보이더 니,어느순간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던데』등 온갖 악담을 퍼붓더라도 한 천날쯤지나면 조치가 흐지부지되려니 하고 기다린 것인데 점점 술마실 가능성이 희박한 것같다.내 그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끔 내 꿈은 내가 맛보지 않았던 소련술.북 한술을 비롯해 문배주.인천탁주.조니워커.블루등 새로운 명주를 맛보게 하는데,잠에서 깨고나면 이게 웬 청승인가 한탄이 나오기도 한다.아직도 광화문 지역의 단골 술집을 찾아다니는데 같이 간 친구들이나 단골들과 술맛에 관해 토론하기도 한다.그들 표현대로라면 술마신 사람보다 더 취해지낸다고 핀잔은 주지만,워낙 술꾼이었기 때문에 내가 다시 마실 날을 기다리는 재미가 있는지 끼어주기는 한다.커피도 공짜로 제공한다.
술 안마시고 나름대로 출판사를 차린뒤 만화책을 만들며 속다짐을 하고 있다.일본만화가 이땅에서 힘없어지는 날,만화가들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잔 해볼까 한다.심야영업 금지조치가 흐지부지되느냐,그날이 오느냐 이제는 둘중 하 나이니 술을마실 가능성은 아직 많다.식구들이 들으면 큰일 날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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