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故이문구씨 투병일기 책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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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지난해 2월 25일 62세로 세상을 뜬 소설가 이문구씨의 1주기를 앞두고 위암 발병에서 타계 직전까지 2년여에 걸친 이씨의 투병 과정을 자세히 담은 메모 형식의 일기가 책으로 출간됐다.

'이문구 문학일기 抄(초)'라는 부제가 붙은 '그리운 이문구'(중앙M&B)로, 책은 1977년 5월부터 이씨가 기록한 다이어리 10여권 분량의 일기 중 2001년 1월 1일자부터 마지막 일기인 2003년 1월 8일자까지를 발췌했다. 이씨 타계 후 유고 동시집과 산문집 등은 출간됐지만 생생한 육성이 담긴 일기가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날짜 옆에 '설(雪)<서설(瑞雪)이기를>'이라고 적어놓은 2001년 1월 1일자 일기에서는 어디에서도 죽음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다. 그 전해 상금이 5천만원인 동인문학상을 받은 것을 두고 "올해는 이문구의 해였다"(김치수), "그 나이에 도둑질하기 전에야 5천만원을 어떻게 만져보겠느냐. 대운(大運)이 텄던 것"(송기원)이라는 주변의 농 어린 축하에 이씨는 "그 표현이 그럴듯하여 '그렇다'고 응수했던 생각이 난다"고 적고 있다. 죽음의 세포가 자신의 몸 한구석을 파먹어 들어오는 것을 까맣게 몰랐던 이씨는 이어 "올해는 나의 갑년(甲年)이다…비로소 60객(客)에 접어든다"며 "나이를 의식하지 않을 것, 갑년을 기념하는 어떤 짓도 하지 않을 것, 더 겸손하고 겸양할 것, 스스로 기(氣)를 접을 것" 등을 다짐한다.

2월 초 뜻밖의 위암 판정이 내려져 위 전부를 드러내는 수술을 받고 항암제 주사를 맞는, 충격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이씨는 꿋꿋했다. 자신이 이사장을 맡고 있었던 민족문학작가회의 운영 문제를 임원들이 문의해 오자 '작가회의 이사장 자리는 발암물질'이라고 혼자 투덜거리고, 2월 19일 수술 직전에는 한동안 담배를 피울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연달아 세 개비를 피웠다.

이씨는 오히려 일기 곳곳에서 수많은 문단 선.후배들의 격려 방문과 모금, 생면 부지의 독자가 산삼 뿌리와 '진상황'이라고 불리는 주목(朱木)의 상황버섯을 보내온 일 등에 대해 고마워했다.

다만 같은 병을 이겨내지 못한 주변의 사례는 이씨를 괴롭혔다. 5월 12일자에서 이씨는 그 전해 8월 위암수술을 받았던 동리 선생의 5남이 끝내 타계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충격을 받았다. 같은 병을 얻은 자로서 종일토록 우울하게 보냈다"고 적었다.

2002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이씨의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다. 이씨는 그러나 체중이 50㎏ 이하로 줄고 늑막에 고인 물을 1천5백㏄씩 빼내면서도 '아무 이상이 없다'는 병원의 설명을 곧이 곧대로 믿었던 듯하다. 10월 4일자에서 "아무 이상이 없다는 병원의 검진 결과가 더욱 조심하라는 뜻으로 들렸다"고 적었다. 당시 가족에게는 이씨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 통보된 상태였다.

이씨는 고통스런 투병 와중에서도 현실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2001년 7월 5일자에서는 중앙.조선.동아 3개 언론사에 대한 국세청 세무조사에 대해 "언론이 예뻐서가 아니라 정부권력의 보복행위가 싫다"며 "신문의 탈세를 TV가 선전선동하고 어용지가 좌우에서 공신노릇하는 것은 꼴사나운 일이다…대(對)언론전은 권력의 말기적 증상의 하나"라고 꼬집었다.

대선 직후인 2002년 12월 20일자에서는 "이회창씨는 자질이 충분하고 신뢰가 가는 인물임이 분명하지만 측근에 포진한 구시대 정객들에 식상한 민심, 무미건조한 미래없는 남성상을 고수하다가 실패를 자초했다"고 적어 놓았다.

책의 뒷부분에는 박태순.한승원.황석영.송기원.김정환.한창훈씨 등 동료.후배 작가 6명이 이씨와의 인연, 함께한 세월 등을 회고한 글모음 '동료작가들이 그리는 이문구'가 실렸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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