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초대석>양궁세계제패 이기식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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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초대 神弓 金珍浩 곁을 鄭甲杓.金亨鐸감독이 대를 이어 지켰다면 金水寧.徐香順,그리고 이번 제37회 터키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3대 신궁으로 떠오른 金孝貞의 곁엔 李起式감독이 우뚝 서있다. 올해 나이 36세.
그는 30여개의 한국신기록을 작성하는 뛰어난 선수였음에도 불구,「불행한 선수생활」을 거쳤다.李감독은 경남 하동중학시절 양궁에 입문했으나 양궁선수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전남 순천고 선수로서였다.
고교1년때 이미 국내 최초로 1천점을 돌파했고 이듬해인 74년 창설대회인 제1회 중.고연맹대회에서 국내 최초로 1천1백점을 기록,朴敬來(前대표팀감독).石東殷등과 함께 75년 제28회세계선수권대회 대표에 선발됐다.동아대4년이던 7 9년 또다시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합숙훈련까지 마쳤다.
그러나 두차례 세계선수권대회에 모두 출전하지 못했다.
대학졸업과 동시에 현역생활을 마감,코치생활을 시작한 이기식은80년 정갑표감독 밑에서 최초의 남자대표팀 코치가 되면서 지도자로서「태릉입촌 1차」를 시작했다.
신통한 성적이 없어 10개월만에 쫓겨난 그는 이듬해 다시 대표코치가 됐으나 제32회 미국세계선수권대회,84년 LA올림픽에서 잇따라 여자들의 금빛에 눌려 태릉을 떠나야했다.「태릉입촌 2차」도 결코 성공이라고 볼수 없었다.
그는 86년 대표팀여자감독으로 격상돼 김수녕과 함께「태릉입촌3차」시대를 맞는다.그리고 88서울올림픽.89년 제35회 스위스세계선수권대회에서 김수녕이 그에게 바친 4개의 금메달로 한을풀었다. 好事多魔.이후「김수녕 편애」「대표팀감독 독식」의 구설수로 그는 태릉과 소속팀 상무를 또다시 오고갔다.
그러던중 한국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뉴올림픽라운드로 경기방식이 바뀌었다.85년 당시 바람이 유난히 심한 태릉의 육사교정에서 개최된 제33회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무려 1천만원의 예산을 요구,지상으로부터 50㎝간격으로 풍속을 측 정하기도 했었고 서울올림픽에선 여자선수들의 생리주기에 연관된 생체리듬을 응용,충분한 효과를 증명해냈던 연구자세가 높이 평가돼 91년11월「태릉입촌 5차」시대를 시작했다.
바르셀로나가 목표였다.세계정상에 올라있는 한국에 필요한 것은오히려 기술 외적인데 있다고 판단한 이기식감독은 새 방식인 1대1 승부에서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으로 보았다.
담력을 기르기위해 한밤중에 잠자던 선수들을 깨워 불암산 크로스컨트리를 시키기 일쑤였고 심지어 공동묘지 돌아오기훈련도 시켰다.그리고 이번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는 특수부대에 입교해 컴컴한 동굴속에서 살아있는 뱀을 맨손으로잡아 입에 물고 기어나오는 초담력 강화훈련까지 시켰다.그런 훈련 덕분이었을까.어쨌든 4개중 3개의 금메달이 그의 눈앞에서 우리선수들의 목에 걸렸다.선수시절 만져보지 못했던 9개의 금메달을 지도자가 돼 따낸 것이다. 〈金仁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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