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비밀협상/미 까맣게 몰랐다/「이­PLO 상호승인」뒷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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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양측 적극자세… 곳곳돌며 14차례 접촉/7월 라빈­아라파트 전격 회동
지난봄 노르웨이의 한적한 시골마을인 에아르네스트에 낯선 얼굴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1백년된 한 저택이 밤늦도록 불을 밝히는 날이 잦았으며,주위 숲을 배회하는 사람들도 종종 목격됐다. 이웃 주민들은 한동안 저택의 동향에 의문을 가졌으나 교수 두명이 공동집필하고 있다는 설명을 듣고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당시 이 저택에서 얼굴을 맞댄 인물들이 수십년 원한관계를 유지해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협상대표라는 사실을 안 사람은 몇명되지 않았다. 그후 팔레스타인자치안이 공식 발표되기까지 협상대표들은 노르웨이내 이곳 저곳을 옮겨가면서 14차례의 접촉을 가졌지만 언론 등에 전혀 포착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동안 중동평화의 후원자로 자처해온 미국까지도 철저히 배제됐다.
비밀협상에 관여했던 소식통들에 따르면 노르웨이 사회과학연구소(NIAS)의 한 연구팀이 지난해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의 생활상 연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비밀채널이 잉태됐다고 한다. 당시 이 연구팀의 책임자였던 테르제로드 라르센이 이스라엘당국으로부터 승인을 받는 과정에서 요시 베일린 당시 노동당의원을 만나게 됐다. 라르센과 베일린의 만남에서 중동평화에 대한 대화가 자연스럽게 오갔고 여기서 라르센은 베일린의 적극적인 태도를 읽을 수 있었다. 베를린은 몇년전에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가 당내에서 호된 비난을 당했던 인물이다.
지난해 7월 이츠하크 라빈 연정의 외무차관에 오른 베일린은 미국주도의 중동평화협상이 또다시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던 차에 그는 지난해 9월 노르웨이 연구팀 독려를 위해 이스라엘을 방문했던 잰 이글랜드 노르웨이 외무차관으로부터 중동평화를 위해 튀니스의 PLO지도부와 이스라엘간에 비밀가교역할을 해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앞서 라르센이 이글랜드를 만난 자리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정착을 위해 노력해보자고 부추겼던 것이다.
베일린도 이글랜드의 아이디어에 귀가 솔깃했으나 선뜻 동의할 수는 없었다. 그때만 해도 이스라엘인의 PLO접촉이 법으로 금지돼 있었기 때문이다. 베일린은 PLO접촉금지법 개정을 서두르는 한편 비공개를 조건으로 이글랜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비밀채널이 열린 것이다.
그후의 PLO접촉은 다자간 중동평화협상을 책임졌던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장관이 주도했다. PLO측도 역시 다자간 중동평화협상을 맡았던 아흐메드 크리아흐 PLO 경제부문책임자를 내세웠다.
최초의 접촉은 지난 1월 PLO대표와 이스라엘 민간인 사이에 노르웨이에서 3일간에 걸쳐 이뤄졌다. 양측 관계자들은 이 만남에서 오랜 적대관계를 진정으로 청산하고 싶다는 열의를 보였다. 그후 이스라엘에서 PLO와의 접촉을 금지한 법을 폐기하면서 양측 접촉이 더욱 활기를 띠어갔다.
3월 들어서부터 이스라엘 고위관리들도 회담에 정기적으로 참가하기 시작했고 주위의 관심을 피하기 위해 밀회장소를 호텔·시골농가 등으로 옮겼다. 급기야 지난 7월에는 라빈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PLO의장간의 비밀회동도 이뤄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양측 협상대표들은 회담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허심탄회하게 회담에 임했다. 협상 자체가 비공식적이었다고 대표단 규모가 적었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가 가능했다.
마라톤회의땐 협상대표들은 한 집에서 묵으면서 하루 세끼 식사는 물론이고 밤이 깊도록 함께 어울려 술과 대화를 즐겼다. 지난 3월 점령지 폭력사태에 이어 봉쇄조치가 취해졌을 때도 회담관계자들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8개월에 걸친 협상결과 마침내 지난달 선언초안이 확정됐다. 이때도 노르웨이를 공식 방문중이던 페레스 외무장관이 영빈관에서 슬그머니 빠져나가 초안에 서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 며칠후 페레스장관이 워런 크리스토퍼 미 국무장관에게 비밀협상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미국으로 날아갔다. 그때까지 미국은 노르웨이 관리들로부터 비밀협상에 대해 귀띔을 받았으면서도 양측이 합의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를 채지못했다.<정명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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