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침체속 물가고 우려(실명제 성공의 길: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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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경제정의 위한 결단”… 통화관리 등 부담/수출목표에 “빨간불”… 투자심리도 위축
금융실명제가 시행 1개월째로 접어들고있다. 「밝고 투명한 사회」가 우리의 목표라면 실명제의 당위성은 재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격적 단행」이 뜻하는 것처럼 사전준비 미흡으로 실명제는 시행이후 중소·영세기업의 자금난,유통거래시장의 마비,기업투자의욕의 위축 등 적지않은 부작용을 파생시키고 있다. 돈을 풀어 막자니 물가도 걱정이다. 실명제는 그 자체의 정착 뿐 아니라 국가 경쟁력 강화를 통한 선진국진입에 목표가 두어져야함은 물론이다. 실명제 정착과 성공적인 경제운용을 위해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를 집중 점검해본다.<편집자 주>
실명제가 시행된지 한달이 지나가고 있다. 급한 김에 현금을 푸는 캠퍼주사를 주고 있지만 이 주사약이 언제 인플레라는 질병으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다. 「경기침체속의 물가고」라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의 가능성도 엿보인다.
금융시장 동향을 보면 전반적으로 실명제 초기의 충격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그러나 연중 최대의 자금수요기인 추석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다 또 하나의 고비인 실명전환시한(10월12일)도 다가오고 있어 어떤 부작용이 나타날지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현금선호 주춤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당국의 중간평가는 실명제의 최전선인 금융기관 창구가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데서 나온 것으로 풀이된다. 우선 초기에 우려했던 예금인출사태는 다행히 없었다. 그러나 3천만원을 초과해 인출할 경우 국세청에 명단을 통보토록 하자 한동안 새로운 예금이 들어오지 않았다. 또 세원 노출을 꺼리는 중소상인과 영세기업에서 현금결제를 선호해 실명제 이튿날인 13일부터 8월말까지 현금통화가 7월 한달의 3.3배인 1조3천억원이나 늘어났다.
이같은 현금통화의 폭증세가 8월하순부터 주춤해졌으며 이달 들어서는 감소세로 바뀌었다.
우려했던 중소기업의 부도사태도 아직까진 심각하지 않다. 그러나 8월중 서울지역의 부도업체는 총 3백40개로 7월에 비해 27%가 늘어났다. 8월말에 급증했던 부도건수는 9월 들어 예년수준으로 되돌아갔으나 추석을 앞둔 이달 중순부터 쉽사리 넘기 힘든 고개가 되리란 예상이다.
○채권거래 회복
금융시장의 문제아는 양도성예금증서(CD)다. 지난 3일부터 3천만원으로 발행한도까지 낮췄지만 무기명이라는 익명성의 매력을 상실해서인지 자꾸만 빠져나가고 있다. 실명제이후 지난 7일까지 6천1백30억원이 순상환됐으며 그만큼 은행의 수신기반을 약화시큰 등 통화관리에도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실명제직후 이틀동안 폭락했던 주가는 곧 회복돼 외형적으로 가장 덜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두차례 크게 출렁거렸다가 실명제 시행이전 수준에 접근하고 있다. 증권업계 관계자들은 실명전환 시한 종료시점이 장기적인 주가흐름의 큰 변수가 될 것으로 본다.
그러나 채권시장 형편은 여전히 심각하다. 8월 한달 회사채의 순발행액이 1천6백71억원으로 7월의 4분의 1수준에 머무르면서 중견기업과 대기업의 장기 자금조달줄을 옥죄었다.
실명제 직후 채권거래가 거의 끊겼던 것에 비하면 이달들어 조금 회복되고 있지만 여전히 거래가 부진한 편이다. 회사채 수익률 또한 14%대 중반으로 두차례의 금리인하 전으로 되돌아간데다 올들어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실명제 아래의 체감경기 또한 좋지 않다. 사정·실명제·공직자 재산공개에 따른 충격이 경제흐름의 맥을 끊으면서 기업들의 투자심리를 더욱 위축시키고 있다. 상거래와 소비도 그전같지 않다.
수출도 안돼 상공자원부가 지난 8일부터 총력지원체제로 선적독려력에 나섰다. 8월중 수출이 8.5%이상 늘어나 적어도 1억달러 정도의 흑자를 낼 것으로 예상했다가 5.6% 증가에 그치고 흑자는 커녕 4천6백만달러의 적자를 기록하자 연간 9% 수출증라는 목표 달성에 빨간불이 켜진 것이다. 물가도 주목의 대상이다. 소비자 물가가 올들어 8월말까지 4.4%의 증가에 머물고 있지만 현재 뭉통뭉텅 풀리고 있는 통화와 각종 공공요금·공산품가격 등의 누적된 인상요인 때문에 내년이후가 문제다. 부동산 가격이 움직이는 조짐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지만 실물투기의 가능성은 항상 잠복해 있다고 봐야한다.
○실물투기 잠재
하반기의 경제성장은 잘해야 5%대로 올해의 연간 경제성장률이 지난 7월 한은의 수정전망치(5.7%)보다 1%포인트 가까이 낮은 4.7∼5%에 머무르리라는 민간연구소의 예측도 나오고 있다. 이러다간 물가는 다락같이 오르고 경기는 위축되는 현상이 계속되지 않을까 우려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지난 7일 현재 은행권의 실명확인과 전환비율은 계좌기준 34%,금액으론 60%다. 그러나 가명예금의 실명전환은 금액기준으로 40%에 머무른데다 실명전환 계좌당 평균잔고가 2백37만원으로 적은 편이다. 한은관계자는 대부분의 거액 비실명계좌 예금주가 아직까지 실명전환을 망설이고 있는 것으로 진단했다. 또 차명계좌의 경우 차명그대로 실명확인을 하는 예가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실명제가 우리 경제를 내실 있게 살찌우는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발리 정착시키기 위해 정부는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각 경제주체는 일시적인 고통을 참고 이를 슬기롭게 극복해나가야 한다. 무엇보다 비실명시대때의 관행과 의식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다.<양재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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