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 적응바쁜 정치권/지구당경비 축소등 허리띠 조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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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올 추석 어떻게 넘기나” 의원들 한숨
실명제 실시로 의원들의 호주머니에 비상이 걸렸다.
여야의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돈줄을 죄는 실명제의 위력을 실감하는 모습이며 씀씀이 줄이기와 떳떳한 새 돈줄찾기 등 자구책 마련에 한창이다. 지구당살림에서 군살을 빼고 각종 행사경비도 줄여 실명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안간힘을 쓰지만 한달여 남은 추석보내기가 1차고비라며 여기저기서 한숨이다.
○…이성호의원(민자)은 24일부터 3일간으로 예정된 지구당 당원수련대회를 초긴축예산으로 치르고 있다. 작년에는 1천2백여명에게 비교적 값나가는 쟁반을 선물했으나 이번엔 1천5백원 정도의 모자로 대신했다. 기타 경비도 바싹 줄여 인원수는 같은데도 지난해 2천만원이 소요됐으나 이번엔 3백만원쯤 들것같다. 이 의원은 작년 추석에는 선물비용 등으로 1천2백만원을 썼지만 올해는 선물을 일절 생략한채 의정보고 형식의 서신으로 때울 예정이다.
민주당의 조세형 최고위원은 최근 지구당에서 굴리던 봉고차 1대를 처분하고 운전수겸 지구당원도 1사람 줄였다. 전화도 1회선 줄여 1달에 모두 2백만원 정도의 비용을 절감했다. 민자당의 초선 지역구 K의원도 승용차와 봉고차를 1대씩 갖고 있는데 이중 승용차는 팔 생각이다.
인건비지출은 줄일수 밖에 없다. 이석현의원(민주)은 『주로 친지 등으로 정책보좌진을 구성,국회 회기중에만 한시적으로 활용해 인건비를 줄일 생각』이라고 밝혔다.
민자당의 기업가출신 한 의원은 지역의 조기축구회·친선경기대회 등에서 『돈좀 내라』고 요구해오지만 돈드는 일은 일단 중단했다고 밝힌다. 물론 당장 이런 행사자금 2백만∼3백만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돈줄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판에 이곳저곳 손벌리는 데마다 집어줄 수는 없는 일 아니냐고 말한다.
일부 농촌지역의 경로협의회 등에서 의원들의 주머니 사정도 모르고 『그래도 국회의원인데…』하며 여전히 손을 벌리는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권자들도 점차 실명시대를 이해해 「요구」가 줄어들고 있다는게 의원들의 설명이다.
○…실명시대에 맞는 새 돈줄을 개발하려는 의원들의 아이디어도 백출하고 있다. 민자당의 한 중진의원은 『그동안 후원회와는 별도로 고교동창 등 5∼6명과 친척 1∼2명으로부터 월 평균 3천만∼4천만원정도 도움을 받아왔는데 이제는 끊기게 돼 고민끝에 이들 특별후원자들에게 식사비용 등을 영수증처리 해달라고 당부했다』고 말한다.
신문광고로 정치자금 모집을 시도했던 민자당의 박범진의원은 23일 3개월간의 모금 결과 모두 1억2천2백83만원을 거둬 목표액인 1억원을 초과 달성했다고 공개했다.
박 의원은 『2천6백31명의 후원자중 대부분이 소액지원이지만 1백만원 이상을 낸 사람도 36명(1.5%)이나 된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실명제실시 이후 후원회 모금에 뜻밖에 애로가 생긴 의원도 있다. 이해찬의원(민주)은 『후원회 결정후 지난 6월 약 1백80만원,7월엔 2백만원 가량이 들어와 회원들의 편의를 위해 은행에 지로를 개설했다. 그런데 실명제 실시 발표후 12일부터 입금액이 딱 끊겼다』고 말한다.
은행 지로를 통해 납부할 때 실명을 확인하는 번거로움이 생긴데다 소액이긴 하지만 자신의 실명이 드러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인 모양이라고 이 의원은 분석했다. 일시적인 현상일수도 있겠지만 후원회 모금에 크게 비중을 두는 의원들로서는 새로운 문제점을 만난 셈이다.
신순범 최고위원(민주)은 최근 한 일간지에 자신이 지은 책 『의지는 고난보다 강하다』의 증보판을 내면서 상당한 크기의 광고를 실었다.
신 최고위원은 『TV에 출연해 라면가게를 운영하던 어려운 시절을 털어놓은 뒤 학교·기업체 등 곳곳에서 그 책에 대한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며 거기에서 나오는 수입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새로운 방식의 돈줄 확보가 정상을 가장한 또 다른 정치자금 조달의 편법으로 활용될 소지도 없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정치인이 서화전시회를 열고 그림구입 등을 권유할 경우 쉽게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않다. 이권이 얽힌 관계일 경우 의원들의 요구에 따라 예상가보다 고액으로 사들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민자당의 한 의원은 또 실명제의 허점을 이용한 자금조달 가능성도 지적한다. 현재 3천만원 초과의 예금인출에 대해 자금조사를 하기 때문에 그 이하의 자금을 주고 받음으로써 그물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한 최고위원은 『정당기탁금의 여야공유,후원회 활성화 등의 합법적인 방법이 있지만 그게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 다른길을 찾으려는 시도가 있을 것같다』고 말한다.<이영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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