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코드, 브라운관에 접속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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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03면

1984년 영화 ‘달빛멜로디’가 개봉됐을 때만 해도 국내 평단은 술렁였다. 극중 두 남자 임성민과 김기석의 관계가 동성애를 암시한다는 해석이 논란을 일으킨 것이다. 23년 뒤, 동성애 코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한국 대중문화 속으로 스며들었다. 국민 드라마로 불렸던 ‘주몽’의 사용(배수빈)-협보(임대호) 커플에서 최근 끝난 인기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민호(김혜성)-범이(김범) 커플에 이르기까지, 남자들끼리의 포옹이나 애틋한 눈빛이 일반 시청자들에게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됐다.

‘커피프린스…’ 남장 여자 윤은혜

이 대목에서 젊은 층에게 최고의 인기 드라마로 떠오른 MBC-TV ‘커피 프린스 1호점’(이하 커프)을 빼놓으면 실례다. 한결(공유)과 남장 여자인 은찬(윤은혜·사진)은 게이 커플인 척하면서 사람들을 속이다가 서로에 대해 묘한 감정을 느낀다. 은찬이야 본래 여자이니 남자에게 끌리는 게 당연하지만, 생전 처음 동성에게 사랑을 느껴버린 한결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이런 미묘한 분위기가 바로 ‘커프’가 누리고 있는 인기의 기본이다.

‘커프’의 두 주인공이야 ‘서양골동과자점’ 같은 일본 만화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듯한 느낌의 캐릭터이지만 남자로 변장한 미소년과 그에 대한 사랑은 사실 그리 새로운 설정은 아니다. 셰익스피어가 ‘십이야’에서 써먹은 설정을 희화화한 느낌이다.
‘십이야’의 바이올라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세자리오라는 이름의 남자로 변장해 오시노 공작의 하인이 되고, 공작을 짝사랑하게 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공작이 연모하는 올리비아가 그를 남자로 착각하고 사랑하게 된다.

셰익스피어 시절 남장 여자의 등장은 당시 극단 사정상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진짜 여배우 대신 변성기 전의 소년들을 분장시켜 써야만 했으니 말이다. 반면 ‘커프’의 공유와 윤은혜는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순정만화 팬들이 관심을 갖는 남성들의 동성애 코드를 거부감 없이 풀어내기 위한 필수 장치다. 어떤 쪽이든 여장 남자보다는 남장 여자 쪽이 훨씬 덜 부담스럽다.

사실 윤은혜가 남장 여인으로 변신해 이렇게 각광받게 된 건 정말 예상 밖의 일이다. 모델 같은 처자들이 즐비한 그룹 ‘베이비복스’ 시절만 해도 윤은혜가 이렇게 연기자로 대성할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당시의 윤은혜는 ‘언니들’에게서 “너 살 더 안 뺄래?”라고 구박받는, 철없는 막내였기 때문이다. ‘소녀장사’라는 당시의 별명에서 오늘의 성공을 예견했다면 당신은 대단한 지감(知鑑)의 소유자다.

아무튼 윤은혜는 이로써 ‘궁’에 이어 두 번째 히트작을 갖게 됐다. 윤은혜의 성공은 많은 독서의 결과라는 해석이 있다. 자신이 출연하는 드라마의 원작이 될 만한 만화나 인터넷 소설들을 늘 읽고, 인물들에 대해 분석하는 취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웃을 일이 아니다. 원작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그만큼 느끼고 있는 배우가 그리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윤은혜가 연기하는 ‘십이야’도 볼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원작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지난해 할리우드에서는 ‘십이야’를 현대판으로 바꿔놓은 코미디 영화 ‘쉬즈 더 맨’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윤은혜는 이제 줄리엣 역할을 더 원할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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