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일본에 한수 가르쳐줄 차례”/바둑 천하통일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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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한국바둑의 세계 4대 기전석권은 눈물 겹고 험난했던 과거를 돌이켜 볼때 더욱 감동적이다.
50년대 한국바둑은 기타니(목곡실)가문의 문하생으로 마당쓸기 등 참담한 고생끝에 일본기원 초단면장을 받아온 조남철9단 혼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0년대말부터 60년대까지 한국 프로들은 한수 배우려는 일념으로 줄줄이 일본유학을 떠났는데 기린아 조훈현9단(당시 5단)이 조치훈9단처럼 일본에 주저않지 앉고 귀국한 것은 한국바둑의 커다란 행운이었다.
후지사와(등택수행)9단이 『진주가 진흙속에서 썩고있다』고 개탄하며 조 9단에게 계속 도일을 종용했으나 조 9단은 끝까지 한국에 남아 척박했던 한국바둑을 크게 향상시켰다. 60년대만해도 한국프로는 일본의 아마추어에게도 패해 한일교류전이 없어졌고 일중교류전이 생겨났다. 철저히 무시받고 설움받던 한국바둑에 88년 후지쓰배,응창기배 등 세계대회가 생겨난 것은 일종의 복음이었다.
제1회 응씨배의 초청티킷은 일본 5명,중국 4명,대만 3명,한국 2명,미국·호주 각 1명. 그나마 한국의 1명은 조치훈9단이었으니 한국바둑은 미국이나 호주와 동격으로 취급당한 셈이다.
조훈현9단이 우승했을때 서양사람들은 크게 놀랐으나 정작 일본에선 『조 9단은 일본에서 바둑을 배웠으니 엄밀히 말해 그 뿌리가 일본이다. 더구나 한국은 조훈현 한사람뿐이다』고 은근히 깔아뭉갰다.
그러나 이무렵 한국에선 이창호라는 천재가 출현했고 서봉수·유창혁 등이 공격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한국바둑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해가고 있었다. 93년에 접어들자 조훈현·서봉수의 구세대와 이창호·유창혁의 신세대가 구축한 이상적인 콤비네이션은 그 힘이 절정에 달했다. 그리고 그 힘은 예상대로 세계 4대기전을 차례로 휩쓸었다.
결승전 때마다 위기를 맞곤 했으나 혼전에 강하고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생명력으로 무장된 한국바둑은 번번이 그 위기를 넘겼다.
이미 중국에서만 한국바둑의 신비를 연구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조치훈9단도 『이젠 일본프로가 한국으로 유학 올 차례』라고 말하고 있다. 조훈현9단은 한국바둑을 두점이상 향상시켰고 그 와중에서 한국바둑은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독특한 기풍과 전법을 창조하여 단기간에 세계를 휩쓸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지적인 게임」이란 바둑에서 한국의 프로기사들은 한국두뇌의 우수성을 다시 한번 세계에 과시했다.<박치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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