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개 펴는 민정·공화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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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계파구분 않겠다” 민주계실세 언질 고무/“우리 나설 시기 생각보다 빠를 것”기대
민자당내 비주류인 민정·공화계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민정계의 한 중진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내년 5월(전당대회 시점)까지는 바짝 엎드려 있어야 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요즘 돌아가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고개를 들 시기가) 빨리 오는 것같다.』
당내 비민주계,특히 민정계의 입장에서 새정권 출범후 지난 5개월간은 그야말로 신산의 세월이었다. 재산공개 파동을 필두로 한 사정바람에서 번번이 걸려든 쪽은 민정계였다. 당직·국회직에서도 비민주계는 소외되었고 간혹 기용되더라도 자리에 걸맞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기득권 계층이라는 약점 때문에 「아얏」 소리조차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민정계가 아스팔트 바닥에서 최루가스를 마셔가며 집권의지를 불태워온 민주계에 비해 전반적으로 도덕성면에서 취약한 것은 사실이었다.
김윤환의원을 비롯한 몇몇 민정계 중진들이 그동안 펴 온 논리는 이렇게 요약된다.­ 『김영삼대통령의 개혁은 시대의 대세다. 모두 동참해야 한다. 그러나 역대정권에서 기득권을 누렸던 우리 민정계가 개혁의 선두에 나서는 것은 누가 보아도 어색하다.』
농반진반으로 털어 놓는 비민주계 의원들의 독설은 대강 이렇다.
『믿을 건 역시 지역구 뿐이다. 부지런히 닦아놓자. 15대 공천에서 오리알이 되더라도 무소속으로 나가 당선만 하면 그 다음은(차기 정권까지) 1년만 참으면 된다. 상황이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쥐도 사람을 무는 법이다.』
『정부측과 당정협의를 하는 자리에서 민주계의원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런 것 아닙니까」라고 결론짓듯 말하고는 자기는 다른 약속이 있다고 먼저 나가버리더라. 행정부 사람들이 나머지 의원들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기가 막히더라.』
『예전의 정책입안 경험을 민주계 당직자에게 들려 주려 해도 「당신은 그간 잘 먹고 잘 살던 사람 아니냐」는 눈길이 느껴져 포기하게 된다. 전쟁기념관 번복소동·무노동 부분임금 파동도 집권당과 정책경험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해 일어난 시행착오들이 아니겠는가.』
『동료(민정계)의원이 이런 말을 하더라. 자기는 10년을 참을 각오를 하고 있다고. YS 5년,그 다음에 DJ 5년이라는게 계산이다. 「15대 물갈이」 얘기가 나오는 판에 그 말이 농담으로만 들리지는 않았다.』
지난 임시국회에서 본회의 대정부 질문자로 내정돼 언론에 발표까지 했던 배명국(3선)·이긍규(2선)의원이 민주당측 질문자에 비해 약체라는 이유로 강삼재·서상목의원으로 전격 교체되자 민정계 의원들은 『남의 일 같지 않다』고 동정하며 한탄했다. 한번 정해진 대정부 질문자가 바뀐다는건 희귀한 일이고,특히 지역구 의원에게는 치명타일 수도 있다.
청와대를 비롯한 민주계 진영도 이런 기류를 잘 알고 있다. 당내 민주계의 정서상 민정계의 불만은 양지에서만 살아온 이들의 푸념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가당치않고,아니꼽기 짝이 없다. 그러나 현실은 민정계의 「숫자」와 집권경험이 필요해지는 쪽으로 점점 가고 있다. 민주계 인사들은 『그래도 피는 못 속일 것』이라고 자위하는 가운데 구체적인 움직임들이 나오고 있다.
지난 19일 민주계의 실세로 꼽히는 최형우의원은 『이제 이한동의원만 만나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0일 김윤환의원,18일에는 이춘구의원을 잇따라 만났다. 최 의원의 활동을 두고 당내에서는 대통령과 교감을 갖고 민정계 다독거리기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무성하다. 최 의원은 『그분들을 만나 보니 정계개편설 같은 데 불안해 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거다. 당신들(기자)이 지어낸 것 아니냐. 계파는 무슨 계파냐. 중요한 건 단합이다』고 말했다.
박관용 청와대 비서실장도 비슷한 말로 민정·공화계를 위무했다. 『집권초에는 민주계가 앞장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행정경험이 없고 수적으로 열세이면서 모든 부문에 앞장설 수는 없다. 앞으로는 능력위주로 인물을 기용할 것이며 그 시기는 내년이 적당하다. 이제 계파를 구분할 시점은 지났다.』
이런 변화에 민정계는 희망을 걸고 있다. 상당수는 아직 『점도 두고 보아야 한다』는 쪽이다. 이번 재산공개때 면죄부를 받아낸 뒤 내년 봄까지 지켜 보겠다는 분위기도 강하다. 어떻든 바야흐로 비민주계가 「정치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노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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