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엔 너그러운 「검찰잣대」/진세근 사회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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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검찰은 최근 피라미드식 방문판매를 한 혐의로 구속되었던 미국계 회사 관계자들을 잇따라 풀어주고 있다.
직접 수사해 구속중인 미국인들을 구속취소로 석방하는가 하면 구속기일 만기전에 기소를 하지 않고 만기를 이유로 석방하는 경우도 있다.
검찰의 이같은 미국인이나 미국계회사 직원들에 대한 조치는 얼마전 똑같은 방법으로 자석요를 판매하던 한국인들을 무더기로 구속한 사건을 생각하게 한다. 검찰에 구속된 한국인들이 구속이 취소되었다거나 구속만기로 석방되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하고 있다.
범행수법과 검찰이 방문판매 등에 대한 법률위반 등으로 사법처리하려는 의지를 보인데 까지는 모두가 같은 이 사건들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한쪽은 한국이고 다른 한쪽은 미국인이라는 차이뿐이다. 그렇다면 같은 법적용을 하는데 검찰은 내국인과 외국인에 따른 잣대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것도 내국인에게는 더 가혹하게 적용하는 그런 잣대를. 검찰의 얘기나 주변상황을 종합하면 이같이 내국인에게 가혹한 검찰의 2종잣대는 법자체 보다는 정치적인 고려가 크게 작용했다.
미국인들이나 미국계회사 간부들을 석방한 것은 ▲이들이 대전엑스포에 각각 1백50만달러와 25만달러를 투자,당초 참가가 유동적이었던 미국의 참가를 사실상 주도했고 ▲미국정부가 한미 통상마찰 방지와 엑스포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으며 ▲정부당국이 이같은 이유로 검찰에 다른 판단을 요구한 것이다. 검찰이 국가적 사업인 엑스포의 성공과 한미통상 마찰을 피하기 위해 부득이 이들을 석방한 것을 이해못할 바 아니다.
이 사건 수사직후 검찰이 정부의 외교·통상 고위관계자로부터 『외교와 국익을 무시한 수사권 발동』이라는 강한 질책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검찰이 실정법을 명백히 위반한 범법자를 떠밀리듯 석방한 사정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검찰은 이들과 같은 혐의로 이미 회사관계자가 무더기로 구속된 「한국인」 피라미드식 판매업체들에는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법은 만인앞에 평등하며 형평성을 지난다는 법언이 국익 때문에 무력해진 상황에서 검찰과 정부가 국민들에게 무슨 근거로 「법의 지배」를 논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당장 한미 통상마찰을 피하는 일도 중요하고 또 엑스포를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법이 형평성을 잃고 법기강이 흔들린다면 주권국으로서 큰 문제다. 또 내국인에게 가혹하고 외국인에게 무력한 법은 국민의 자긍심과 자존심을 뭉개 열등감을 심어줄 수 있다.
세계 어디에도 자국민을 비하하는 나라는 없으며 스스로 자국민을 얕보는 국민이 국제사회에서 존경받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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