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민당 누르니 미 대사가 몸 낮춰 면담 요청 '총리 같은' 오자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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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일본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사진) 민주당 대표의 위상이 확 달라지고 있다. 지난달 집권 자민당을 누르고 참의원 선거를 압승으로 이끌면서 내치는 물론 외교.국방 부문에서도 주도권을 잡아 가고 있다.

오자와 대표의 달라진 위상은 토머스 시퍼 주일 미국대사가 이례적으로 그를 찾아와 만난 데서도 단적으로 나타났다. 시퍼 대사는 부임 이래 한 번도 야당 대표를 찾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론조사에서 민주당의 인기가 자민당을 누르기까지하자 평소 자민당만 상대하던 미국의 대접이 확 달라진 것이다.

시퍼가 오자와를 찾은 가장 큰 목적은 테러대책특별조치법(특조법) 연장을 위해서다. 특조법은 일본 해상자위대가 인도양에 파견돼 미국을 비롯한 10여 개국 해군 함정에 연료를 공급하는 군사지원활동의 근거가 되고 있다. 미국의 요청으로 지금까지 두 차례 연장됐으며, 11월 1일 기한이 만료되므로 이를 연장하려면 국회 동의를 다시 얻어야 한다. 그런데 지난달 선거로 특조법 연장의 칼자루를 쥔 참의원을 민주당이 좌우하게 되자 시퍼 대사가 몸을 낮추고 오자와를 찾은 것이다.

오자와 대표는 시퍼 대사가 이달 1일 면담을 요청하자 "일면식도 없는 분을 만나서 무슨 할 말이 있느냐"며 딱 잘라 거절했다. 애가 탄 시퍼가 다시 면담을 요청해 결국 8일 오후 만남이 이뤄졌다.

이 자리에서 시퍼는 특조법 연장을 요청했지만 오자와 대표가 "유엔의 승인도 없이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에 일본이 계속 참여할 명분이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

미국의 딕 체니 부통령이 방미 중인 고이케 유리코 방위상에게 특조법 통과를 당부했지만 오자와 대표를 설득할 만한 특별한 대책은 아직 없는 실정이다.

오자와 대표의 특조법 관련 발언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밀고 있는 특조법 연장과 헌법 개정에 잇따라 반대함으로써 아베 정권 타격→중의원 해산→총선 실시→정권 장악의 길을 걷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아베가 자민당에서조차 퇴진 압력을 받으며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면, 오자와는 정권 창출을 향해 달리고 있는 셈이다. 오자와 대표는 더위가 가시는 다음달부터 지방을 돌며 지지기반 다지기에 나설 계획이다.

도쿄=김동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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