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사 산증인-작사가 반야월|『불효자는 웁니다』이후 가사 짓기 50여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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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우리 가요사의 산 증인 반야월씨(77·본명 박창오)와 만나는 젊은 후배 가요인들은 50대도 안돼 보이는 그의 건강한 모습과 악수할 때면 손이 아플 정도로 억센 힘에 깜짝 놀라고 만다
20여 년째 「한국가요작가 동지회」(원로원) 사무실로 사용되는 중구 초동 명보극장 옆의 그의 작업실은 4층에 있다. 다른 원로 가요인들은 힘들어하지만 그는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비호처럼 오르내린다. 『50년대부터 우리 가요인들이 이 근처에서 몸을 부대끼며 살아왔죠.
당시에는 냇물도 흘러. 「스카라계곡」이라 불렀었는데 이제는 선남선녀들이 화려하게 왔다갔다하죠. 화려한 젊은이들의 세계에 파 묻혀 살고 있는 것이 공기 좋고 조용한 곳보다 더 재미있어요.』
원로 가요인들과 담소하며 후배들의 방문을 받는 것 이외에는 조용하게 지내는 편이지만 일단 말문이 열리면 유리창이 울릴 정도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다
수년 전 어느 신문이 그를 두고 .반야월옹」이라고 표현한 것이 못내 섭섭하다고 했다.
부인 윤경분씨(73)가 노환으로 미국에서 요양하고 있기 때문에 『빨래·청소를 모두 직접 하고 있다』며 명실상부한 노익장을 과시한다.
『가사노동이면 운동량은 충분해요. 늙었다고 보약을 먹거나 헬스클럽을 가거나 등산을 하는 등 따로 운동을 할 필요도 없어요 .항상 즐거운 노래를 곁에 두고 명랑하고 밝게 살고 있는 것이 건강의 비결인 것 감아요.』
최근 동료들이 속속 타계하거나 병석에 눕게 돼 점점 외로움을 타는 그를 위로하려고 술자리라도 마련하면 젊은이들이 오히려 당하고 만다.
술자리는 반세기가 넘는 우리대중 음악의 추억을 안주 삼아 시간가는 줄 모른다. 『4, 5차 자리는 가야 인간의 취기가 오른다.』는 그는 『내일 모레면 80이지만 아직도 나보다 술이 센 젊은이를 별로 못 봤어요.』라며 호탕하게 웃는다.
「가요계의 옥편」으로 통하는 그는 아직도 우리 근대 문화사 연구자들에게 열심히 자문해 주고있다.
『지금은 거동이 어렵지만 박시춘과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하면 반세기 넘는 가요의 히트곡들을 서로 수십 곡씩 줄줄이 외어 부르곤 했지요.』
자신이 노랫말을 지은 수천 곡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현존하는 인물로 우리 가요곡 가장 많이 암송할 수 있는 인물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나.
『노래를 외우는 것은 기억력이 좋다는 것 이전에 노래를 좋아하고 감동을 깊이 받았다는 뜻이죠.』
그러나 그는 최근 젊은 음악인들의 노래들이 편곡·연주 솜씨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으나 노래의 내용을 담는 노랫말이 값 싼 사랑타령에 머물러 있는 것에 대해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또 40∼50대들이 수십 년 전에 그가 만든 노래들을 아직도 애창곡으로 부르는 것은 고맙기도 하지만 그만큼 새로운 작품들이 제대로 나오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아 한편으론 아쉽다고 했다.
수년 전부터 기금을 마련해. 「반야월 작가상」을 제정, 우리 가요의 맥을 이어줄 작품에 대해 시상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이렇다할 작품이 안 나오는 것도 그를 쓸쓸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면서도 조운파씨의 『칠갑산』·신상호씨의 『부부』, 박목월 시인 『고려청자』등의 가사는 지금도 음미하면서 즐기고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진해농산학교를 졸업하고 37년 전국가요음악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하며 가요계에 데뷔한 그는 예명만도 천 개가 넘어 다채로운 활동을 알 수 있게 한다.
37년에『불효자는 웁니다』로 가수로 데뷔할 당시에는 진방남이었고 새로운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추미림·박남포·남궁려·금동선·허구·고향초·옥단춘·백구몽 등의 이름을 사용했다, 한사람이 너무 많은 작품을 쓴다는 인상을 주게 되는 것을 피하고, 일제의 탄압이나 월북 등의 이유로 제 이름을 쓰지 못한 작품을 햇빛 보게 하는 데에도 일부 사용되었다고 한다.
반야월이란 예명만을 사용한 것은 6·25이후부터다.
반달이라는 뜻의 반야월이란 예명은 꽉찬 보름달보다 가능성을 함축 할뿐만 아니라 다정다감하고 로맨틱한 매력이 있어 애착을 가지게 됐다는 것.
우리 근대사의 궤적을 노랫말로 표현한 그의 작품을 기리기 위해 4년 전부터 전국 곳곳에 그의 노래비가 하나둘씩 세워지고있다. 지난달 18일엔 그의 고향마산의 여객선 터미널 앞에 『내 고향 마산항』노래비가 세워졌고 89년엔 우리나라 가요의 최고 히트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울고 넘는 박달재』의 노래비가. 「천둥산 박달재」현장에 건립돼 관광명소로 탈바꿈했다.
또 6·25의 비극을 가슴에 사무치게 표현한 작품인 『단장의 미아리 고개』노래비도 서울시의 미아리 공원 조성계획의 하나로 곧 세워질 전망이고 노래방에서 인기순위 1위를 기록하며 최근 젊은 가수들이 경쟁적으로 다시 편곡해 부르고 있는 『소양강 처녀』의 노래비가 아름다운 소양호반을 지키게 될 날도 멀지 않았다. <채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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