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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통령 조사」의 해법(송진혁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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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직대통령을 둘러싼 갈등이 심각하다. 감사원은 율곡사업과 평화의 댐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조사해야 겠다고 벼르고,야당은 조사는 물론 사법처리까지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청와대와 여당은 조사를 반대하면서 정치보복 불가 입장을 고수하는 듯 하다. 전직대통령의 재임중 일을 「조사」 하는 것이 과연 법률적으로 타당한가 하는 논쟁도 벌어지고 있다. 개인 비리가 아닌 대통령으로서의 정책결정이나 업무수행은 조사대상이 될 수 없는 통치행위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반론도 나오고 있다.
○악례 안만들 1차 책임
전 대통령의 재임중 행위를 문제삼는 선례를 만들 경우 어떤 대통령이 소신있는 정책추진을 할 수 있겠느냐는 주장이 있는 반면 그들에 대한 조사없이 의혹규명이 안되므로 성역없는 조사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전 대통령을 둘러싼 이런 시비는 양쪽 모두 단단한 논거를 갖고 있고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불복할 다수가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자칫 국론분열 현상까지 우려된다. 조사를 하자니 부작용이 너무 크고 덮어두자니 핵심 의혹이 안풀리고 어느쪽 편을 들기도 어렵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런 갈등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 만은 없다. 이 문제는 단순히 전 대통령대 감사원,또는 수백명 정치인끼리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헌정사의 전통과 진로,앞으로의 우리 정치에 심대한 영향을 줄 문제다. 세기말의 이 중대한 시기에 그렇잖아도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언제까지 이런 문제로 머뭇거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것인가. 우선 전 대통령쪽에서 할 일이 있다고 본다. 전 대통령은 자기 문제를 더 이상 회피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통령 재임중 행위를 퇴임후 조사하는 선례를 만든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그런 선례를 만들지 않게 할 1차적 책임과 열쇠는 바로 전 대통령 자신들에게 있다. 스스로 입을 열어 전 대통령다운 태도와 용기로 솔직하게 전투기 기종 변경,평화의 댐 결정 경위를 밝히는 것이다.
○훌훌 털고 자유인 돼야
솔직이 말해 전 대통령들은 지금 사면초가의 처지다. 틈만 나면 「체포조」가 몰려들고 총애하던 심복들이 줄줄이 잡혀가고,심지어 그 진영이 부정축재로 몰아 압수한 고서화까지 착복했다는 따위의 엉망진창의 옛 얘기가 쏟아지고 있다. 자기의 안기부장·장관·수석이 잡혀갈 정도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문제 아닌가. 인간적 도리로 말하더라도 그런 심복들이 잡혀가면 입을 열어 뭣인가 말하는게 옳를 것이다. 언제까지 침묵으로 버틸 수 만은 없다. 지금 외출하기도 거북하고 골프·등산도 마음놓고 하기 어려운 이런 상황에서 전 대통령들은 하루빨리 해방돼야 한다. 한번 훌훌 털고나서 자유인이 되고 전직 대통령이 응당 가져야 할 본래 자리를 회복하는 것이 좋겠다. 다음으로,우리 모두 특히 전 대통령들을 공박하는 쪽에서도 생각할 일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배타적 단선 명분론은 그만두자는 것이다. 나쁜 과거를 청산하고 의혹은 조사하고 비리관련자는 처벌해야 한다는 말은 다 맞다. 그러나 그런 옳은 주장도 그것이 우리의 현실과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에 어떤 기여를 하는가 하는 점도 함께 고려돼야 우리사회 전체가 채택할 수 있는 선택이 될 것이다. 그런 고려없는 모든 의혹 조사,모든 비리 척결이라는 배타적 단선 명분론은 이 복잡 다양한 현실에 적용되기 불가능한 것이다.
지금 문제되는 전 대통령들의 재임기간은 한마디로 거세배독 시절이었다. 오늘날 김영삼대통령은 정치자금을 한푼도 안받는다고 하지만 당시는 대통령이 정치자금도 만들고 휘하의 공식·비공식 조직에 활동비도 대고,숱하게 금일봉도 주는 것이 공공연한 일이었다. 당시엔 이런 일이 정치의 필요악쯤으로 치부되고,어떤 의미에서는 정도 차이로 야당정치인들 역시 정치자금을 만들고 조직 가동비를 대고 금일봉을 주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돈 다 어디서 났느냐,그 돈 역시 뇌물 아니냐,사법처리해야 한다고 들이댄다면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일까.
○단선 명분론으론 곤란
과거청산도 말은 쉽지만 현실적으로 그리 간단한건 아니다. 일부 주장대로 5·16또는 10월유신의 주동자를 공직추방·사법처리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주동자 다음가는 차하급 주동자와 그다음 또 그 다음의 관련자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기억으로는 10월유신 당시 야당정치인 중에도 공개적으로 유신을 지지한 사람이 있었고 여당을 1중대,야당을 2중대라 부르던 시절 2중대의 창당에서부터 핵심역할을 한 사람도 있는데 이들의 책임은 어떻게 되나. 무엇보다 견딜수 없는 것은 그런 나쁜 체제에 너는 왜 굴복했느냐는 도덕적 추궁이다. 용감한 야당,용감한 언론,용감한 판사,용감한 국민이었다면 타도든가 옥쇄가 있을 뿐인데 한번도 아니고 몇번씩,몇년도 아니고 30년도 넘게 굴복하고 따라갔느냐고 묻는다면 견딜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가령 전·노정권 12년이 나빴으면 나빴을수록 그런 체제에 참여하고 따라간 야당도,국민도 그만큼 더 비하되고 마는 것이다. 단선 명분론이 가져오게 되는 이런 자독현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요컨대 전직대통령 문제는 당사자들이 내 부하가 다 감옥에 가더라도 나만 빠지자고 해서도 안되고,공박자들이 내 한을 풀고 보자거나 내 정치적 입장부터 강화하자는 식이어서도 안된다. 나쁜 과거를 털자는 판에 불행한 선례를 또 만들어서는 안될 일이다.<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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