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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판사」 명단공개 발상(사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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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소장판사들의 개혁건의로 촉발된 사법부의 개혁논의가 엉뚱하게 사법부와 변협간의 대립양상으로 변질되는 감이 있다.
소장판사들의 개혁주장을 지지하면서 변협은 일부 법원 수뇌부와 이른바 「정치판사」의 퇴진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측은 이런 변협측의 주장은 사법부 독립을 훼손할 우려가 있는 것이라고 반박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뜻임을 밝혔다. 그러자 변협측은 다시 「정치판사」 명단공개를 검토하겠다고 맞서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문제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사법부의 독립과 신뢰를 강화하는데 있고,논쟁의 초점도 여기에 집중되어야 한다. 지난날 사법부에 문제가 있었음은 재조의 노·소장간에나,재조­재야 가릴 것 없이 다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문제를 어떻게 씻고,되풀이하지 않을 개혁을 어떻게 추진하느냐는 것이 핵심이지 여기에 다른 요소가 끼여들 틈은 없는 것이다. 개혁방안을 둘러싼 논쟁도 어디까지나 법률가 답게 법과 논리에 따라 해야지 여론의 압력형태로 강요하는 방식이어선 곤란하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20,30명의 「정치판사」가 있고 명단을 공개할 수도 있다는 식의 변협측 주장은 사법부 개혁에 대한 냉철한 법률가의 의견제시로서 온당한지 의문이다. 우선 법으로 신분이 보장된 법관이 외부 요구로 물러나는 선례가 나오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이른바 「정치판사」라 불릴만한 인물들이 있음은 우리도 느끼지만 실제 물러나야 할 「정치판사」란 어떤 사람이고,그것을 누가 규정할지에 관해서는 엄청난 논란이 벌어질 것이다.
그런 「정치판사」가 막연하게 20,30명 있다는 변협측의 주장은 법률가적 주장이라기 보다 오히려 정치인적 주장에 가깝다. 변협의 이런 주장만으로도 이미 사법부의 신뢰에 적잖은 손상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당초 사법부 개혁의 문제제기를 한 소장판사들 중에서도 변협주장에 거부감을 보인다는건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일 것이다. 변협으로서는 대법원이 곧 개혁방안의 결론을 제시한다고 하는 만큼 명단공개 운운에 앞서 그 내용을 보고 의견을 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렇다고 우리는 「정치판사」라는 표현으로 제기된 사법부의 문제를 덮어두자는건 아니다. 이 문제 역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임은 분명하다. 다만 법원의 독립과 신뢰가 유지·강화되는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이미 변협 등의 문제제기로 어떤 사건을 담당했던 어떤 인물들이 이런 범주에 드는지 상당수가 지목되고 있는 형편이다. 스스로 양심을 어겨 정치재판을 했는지 여부는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 것이다. 문제가 이처럼 불거진 이상 스스로 거취에 용단을 내리는게 좋겠다.
우리는 이번 일련의 일들이 획기적인 사법부 개혁의 실현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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