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술은 새부대에” 대법원 물갈이설/변협,사법부 개편결의 왜나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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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후의 인권보루역 못했다” 강수/「판사실 출입금지」 등 불만도 작용/해방후 「불신임」표명은 이번이 네번째
대한변협(회장 이세중변호사)이 1일 사법부 개편과 개혁에 관한 결의문을 통해 대법원장을 포함한 법원 수뇌부의 전면개편을 들고나온 것은 85년 당사 유태흥 대법원장 퇴진 권고결의안 채택이후 처음나온 극히 이례적인 일로 법조계 전체에 큰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성명서보다 무게
변협은 소장판사들의 성명을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지지 표명과 개혁을 촉구하는 내용 정도의 성명서를 내놓을 예정이었으나 지난달 30일 긴급이사회에서 보다 강도높은 톤으로 사법부 전면 개편을 요구하고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하자 성명서보다 격이 높은 결의문을 채택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변협은 이번에 나온 결의문이 전국 지방변호사회장의 협의를 거쳐 대한변호사협회 이름으로 나왔다는 점에서 협회장 이름으로 나오는 성명서보다 훨씬 무게가 실렸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 결의문의 핵심은 『개혁이란 「새 술」은 개편된 법원이라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며 사법권 독립 의지가 투철하고 사법부를 근원적으로 개혁할 의지가 있는 인사로 대법원을 「물갈이」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다.
결의문은 『법원 수뇌부를 이루고 있는 상당수 법관은 자기 성찰의 개혁 의지가 없기 때문에 「개혁주체」가 될수 없으며 오히려 「개혁대상」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개혁주체 안될말
소장판사들이 주장한 사법부의 과거 청산에 있어서도 일정한 기준을 정해 문제가 있는 법관들은 스스로 퇴진해야 한다고 밝힌 것도 주목할만 하다.
변협은 물러나야 될 사람의 기준으로 ▲과거 정치권력에 영합해 납득할 수 없는 재판을 한 인사 ▲무리한 영향으로 말이 많았던 시국재판때 양형·주문 등을 조정·통제한 인사로 지금도 법원 수뇌부에 남아 있는 사람 등을 꼽았다.
변협의 한 관계자는 『법관은 관료보다 성직자에 가까운 직업이라 할수 있다』며 『당시처럼 암울한 시대상황에선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법관의 숭고한 가치를 너무나 평가절하 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변협은 이같이 강도높은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게 된 배경에는 그동안 두차례 법원장회의를 통해 법원 수뇌부가 내놓은 개혁안이 변호사의 판사실 출입금지·전관예우 근절 등 너무 지엽적인 문제에 머물러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는 재야 법조계의 불만이 깔려 있다.
이세중 변협회장은 결의문 채택 배경에 대해 『사법부가 국민의 불신을 받는 근본 원인은 법원이 정치권력 앞에 최후의 인권보루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인데도 이에 대한 시정 노력이 전혀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날 회의과정에서 『전국 1천1백여명의 법관중 극히 일부에 지나치 않는 소장법관들의 건의서만을 보고 결의문을 내는 것은 너무 성급한게 아니냐』는 소극론도 있었지만 『소장법관들의 행동이 없었더라도 법원 개편은 누군가가 요구해야 한다』는 적극론이 압도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장판사와 상통
재야 법조계가 법원 수뇌부에 대해 「불신임」 의사를 밝힌 것은 해방이후 김병로 대법원장,71년 사법파동때 민복기 대법원장,85년 유태흥 대법원장에 대한 사퇴권고 결의안 채택에 이어 이번이 네번째다.
변협은 또 88년 5월 소장판사들이 김용철 대법원장 불신임 서명운동을 벌일 당시에도 지지성명을 내 이일규 대법원장체제의 발족에 일조했었다.
특히 유 대법원장 사퇴 권고 결의안은 시위학생에게 무죄를 선고한 법관들과 법률신문에 부당한 법관인사를 비판하는 글을 기고한 서태영 당시 서울 민사지법판사의 지방전출에서 발단됐다는 점에서 『사법부 개혁을 위해선 법관 독립을 위한 인사제도 및 법원수뇌부의 개편이 선행돼야 한다』는 이번 소장판사·재야 법조계 주장과 일맥 상통한다.
법조계의 많은 인사들은 『대법원장을 중심으로 빈틈없이 짜여진 조직하에서는 누구도 위의 눈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현 제도하에선 정치적 상황에 따라 법관의 소신있는 판결이 얼마든지 외압에 의해 굴절될 수 있다』며 법원의 개편은 필연적이라고 지적했다.<정철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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