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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필요한 정부언론관/「정 기자 구속」항의 농성을 풀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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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권영해 국방장관 출국금지 보도와 관련,명예훼손혐의로 전격 구속됐던 중앙일보 정재헌기자가 20일 오후 권 장관의 고소취소로 풀려났다.
명예훼손죄가 피해당사자의 처벌요구가 필요한 반의사불벌죄이기에 정 기자 사건은 권 장관의고소취소로 어찌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듯 보인다.
하지만 중앙일간지 현역기자의 구속이 81년 이후 처음인 정 기자 구속 1주일은 「과연 언론의 역할은 무엇이며 민주사회에서 권력과 언론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를 되돌아보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정 기자가 구속돼 있는동안 중앙일보 기자들은 정부의 언론정책에 항의하는 농성을 벌였다. 언로련과 기자협회를 중심으로 기자들의 서명운동이 전국적으로 시작됐으며 편집인협회·변협 등 각종 단체들의 성명도 잇따랐다.
전세계 30만 기자들을 대표하는 국제기자연맹(IFJ)과 프랑스의 「국경없는 기자협회(RSF)」,노르웨이 기자협회 등은 청와대에 이번 사태에 대한 우려와 항의를 표시하는 서한을 전달하는 등 정 기자사건은 국제적으로도 커다란 관심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정부의 시각은 오인환 공보처장관의 발언에서 잘 드러났듯 『단순한 오보사건을 정부의 언론탄압으로 몰고간다』 『언론이 진지한 자성과 반성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 장관의 표현대로 정 기자 사건이 단순히 오보와 명예훼손 사건에 불과한 것인가.
국내외 언론의 항의와 각종 사회단체들의 지지성명이 이어진 것은 「오보를 내도 좋다」는 표시거나 오 장관의 표현대로 「언론이 사태를 몰고가기」위한 것이 아니었다.
국내외 언론들의 항의는 정 기자의 구속을 통해 문민정부의 위험한 언론정책과 언론관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문민정부 출범이후 국민들은 거대한 개혁의 물결을 지켜보고 있다.
30년간의 군사독재 정권아래에서 켜켜이 쌓여왔던 수많은 부정과 부패·비리들이 하나씩 단죄되고 있으며 베일에싸인 권부였던 청와대는 이제 개혁의 선봉장이 되어있다.
개혁이라는 역사의 도도한 격류를 현장에서 지켜보는 기자들도 이를 지지하며 개혁의 주체들이 밝히는 「혁명보다 더 어려운 개혁」에 공감하고 있다.
개혁의 총론적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그 각론에서는 즉흥성과 무리수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지만 언론이 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이유도 개혁에 대한 공감과 개혁의 어려움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보면 언론은 그동안 문민정부 개혁의 가장 큰 지지자였다.
건강한 민주주의를 위해서 정부와 언론은 영원한 동반자이자 끊임없는 견제와 갈등의 관계여야 한다는 원론적 가치도 때로는 무시되었다.
누군가가 토사구팽을 얘기하며 정계를 떠나고 「문민독재」라는 불평이 일거나 사정이 현 정부에 반대했던 특정인들을 표적으로 한 느낌을 줬을 때도 「개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대의를 언론은 믿었다.
중앙일보 정 기자 구속사태를 놓고 국내외 언론과 단체들의 항의가 잇따른 것은 개혁의 당위성을 무시한 언론의 집단 이기주의 때문이 아니고 문민정부의 대언론관이 위험수위에 도달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정 기자의 보도는 개인의 사생활이나 추문을 들춰내 독자의 흥미를 끌자는 것이 아니었다.
전 국민의 생존권과 직결된 무기도입 과정에서의 비리,베일에 싸인채 진행되고 있는 율곡사업 감사와 관련돼 계좌추적과 내사를 받고있다고 이미 여러차례 보도된 관련자들에 관한 기사였다.
만일 정부가 공인에 대한 추적보도의 내용이 일부 틀렸다는 이유로 즉각적인 해명과 사과에도 불구하고 해당 기자를 덜컥 구속한다면 우리의 취재환경에서 언론이 설땅은 어디고 국민의 알권리는 어떻게 충족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에 정치인들이 관련되었다는 보도를 정부는 부인했지만 그후 사실로 밝혀졌고,슬롯머신 수사에서도 검찰·정치인 등 관련자 보도를 정부가 부인했지만 이건개 전 고검장 등의 수뢰사실이 밝혀졌다. 이같은 현실을 날마다 체험하고 있는 기자들로서는 정부기관의 발표만을 가지고 기사를 쓸 수 없다.
정부 발표만을 언론이 보도한다면 진실은 밝혀질 수 없고 언론은 국민에 대해 의무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 피해자는 과연 누가 될 것인가.
국민의 알권리를 수임받은 우리기자들은 이같은 정부의 자세가 변하지 않는한 정 기자처럼 감옥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국부이며 건국초기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은 『신문없는 정부보다 정부없는 신문을 택하겠다』고 설파했다.
아무리 문민정부가 소중하다해도 국민의 기본권과 민주주의의 기반인 언론의 자유보다 더 소중할 수 없다고 믿는다.
아무리 문민정부가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다 해도 언론의 비판과 추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라서는 안되며 현명한 민주정부는 이를 요구해서도 안된다.
언론의 찬양과 찬사만을 요구하는 정부는 그것이 총칼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한 것이든 결코 민주정부일 수가 없을 것이다.
정 기자 사건을 통해 우리는 개혁과 문민시대의 언론역할과 언론자유의 소중함을 깨달으며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진실을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중앙일보기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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