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학춤 '90살 대가' 마지막 춤사위 뽐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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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기로 했다. 입고 온 정장을 벗자 90세 어르신의 상체는 뼈만 앙상했다. “무릎도 시려. 그래도 가락만 나오면 내 젊은 애들 하나도 부럽지 않지.” 옷고름을 가지런히 하고 두루마기까지 걸친 채 카메라 앞에 섰다. 포즈를 취해 달라는 말에 “그냥 뻘줌히 서 있는 건 내 체질이 아녀. 가짜로 춤 추는 것도 싫고”라고 말했다. 같이 온 공연기획자 진옥섭씨가 급히 굿거리 장단을 흥얼거렸다. “덩더꿍 덩더더러러, 덩더꿍 쿵덕∼.” 지팡이를 어깨에 얹고, 사뿐사뿐 걷는 모양새라. 요란하진 않지만, 노익장의 발매무새엔 가슴을 쿵 내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전통 춤꾼 문장원옹(90·동래야유보존회장). 현존하는 최고 한량 춤꾼인 그가 생애 마지막 춤판을 벌인다. 바로 7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여는 ‘노름마치뎐 긔 첫판’이다. 그와 한 시대를 함께 풍미했던 동료, 그리고 후배들이 그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정 공연’이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 ‘동래학춤’과 전매특허인 ‘한량무’를 선보일 예정이다. “이번이 끝이야. 힘도 빠지고 예전만큼 흥도 잘 안 나. 제자 수백명 배출했으면 되는 거 아녀.”
문옹은 부산에서 알아주는 한량이었다. 그가 기방 출입을 처음 한 것은 열입곱살때.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 시험에 두번 연거푸 낙방한 뒤였다. 동갑내기 천석꾼 사돈을 따라 요정을 드나들며 젊음을 한껏 즐겼다. “못 된 짓이란 못 된 짓은 그때 다 했지. ‘자고 일어나면 내일 뭘 하고 놀까’가 유일한 삶의 목표였어.”

그의 집안은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대신 주변에 돈 많은 아전 집안의 2세들이 즐비했다. 그는 일종의 바람잡이였다. 기생들이 그를 보기 위해 앞다투어 방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고 한다. 같이 춤추고 노래하던 동래기생 200여명의 이름을 그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작업의 달인’의 원조였던 셈이다.

단 그의 유별난 점은 ‘얼굴 좋은 동기(童妓)’는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나이 든 예기(預妓)에 푹 빠졌다는 것. 그녀들의 한서린 ‘육자배기’에 청년 문장원은 묘한 감정의 골을 느꼈다. 그 가락에 춤을 따라 밟아갔고, 이듬해부턴 본격적으로 거리 춤판을 기웃거렸다. ‘기생 오라버니’ 같은 외모에 기방의 실내춤과 거리의 마당춤을 두루 소화해 내자, 그의 춤솜씨는 곧 소문이 퍼졌다.

스무살이 넘자 그는 떠돌이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먹고 살기 위해 만주로 건너가 외판원 생활을 했고, 징용(그의 70여년 춤인생 중 유일하게 춤과 인연을 끊은 기간이었다고 한다)에 끌려가 1년간 일본에서 살기도 했다. 해방 직후 세무서 직원으로 채용됐고, 한국 전쟁이 일어난 뒤엔 가마니·멍석 등을 만드는 회사의 임원으로 부산과 서울을 오가기도 했다. 그러나 공무원이든 회사 간부든 노는 기질로 유명한 그에게 맡긴 일은 외부 손님을 접대하는 일종의 ‘술상무’역이었다.

“어릴 때 인연 맺은 기생들이 전국에 죄다 퍼져 있었거든. 어딜 가다 술 한상 제대로 받아보기 쉬었지.”

60년대 들어 부산에선 가면극에 대한 열기가 높아졌다. 부산 유지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동래야유(東萊野遊·탈을 쓰고 추는, 부산 고유의 춤)를 복원시키고 싶어했다. 문옹이 적임자였다. 65년 ‘동래민속연구회’가 탄생했고, 문옹이 수장을 맡아 그해 10월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해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로 인해 67년 동래야유는 무형문화재 18호로 지정됐다.

이후 문옹은 동래민속관을 만들었고, ‘동래학춤’ ‘동래지신밟기’ 등을 복원시켰다. 무엇보다 그는 즉흥춤의 대가였다. 시나위 가락에 맞춰 엇박으로 뒤뚱거리는 춤새는 아무도 흉내낼 수 없었다. 한 무용평론가는 문옹을 가리켜 “구순의 텅 비운 몸으로 나가 여백의 공간을 채우는 한 폭의 세한도”라고 극찬한 바 있다. “외우고 연습해서 되는 게 아니지. 평생을 춤에 절어 살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거야.” 노는 게 곧 춤이요, 춤이 곧 삶이었던 문옹. 이번 무대는 살아있는 거장의 마지막 한풀이요, 씻김굿일지 모른다. 02-3216-1185.

글=최민우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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