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주의와 새옹지마/정규웅(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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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찍이 이바노비치의 『도나우강의 푸른 물결』에 자신이 쓴 노랫말을 붙여 부른 성악가 윤심덕의 마지막 노래 『사의 찬미』는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돈도 명예도 행복도 다 싫다…」로 시작된다. 1926년 7월 일본에 건너간 윤심덕은 10곡의 노래를 취입한 뒤 8월1일 당초에는 예정에 없던 이 노래를 추가로 취입하고 이틀뒤인 3일 애인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두얼굴가진 돈과 명예
이 노래는 죽기 직전 그녀의 심정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녀에게 있어서의 사랑이란 이 세상 모두와도 기꺼이 바꿀 수 있을만큼 절대적인 것이었지만 이룰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의 지표로 삼고 있는 「돈」도 「명예」도 헌신짝처럼 내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윤심덕이 아직까지도 전설적인 이미지로 남아있는 까닭은 그녀의 남다른 재물이나 극적인 죽음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사랑을 위해 이미 보장받고 있던 돈과 명예를 죽음과 맞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럴수 있다면 그녀의 행위는 한낱 시원찮은 가십에 머무르고 말았을는지도 모른다.
돈과 명예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살아가기 위해 돈과 명예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살아간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돈과 명예가 자칫하면 사람의 한평생을 망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려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것 같지 않다.
사람이 그토록 소유하기를 갈망하는 돈과 명예는 일반적으로 두가지 속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많이 더욱 큰것을 갖고 싶게 한다는 점,다른 하나는 어느 한쪽을 얻으면 다른 한쪽까지 마저 얻고 싶게 한다는 점이다. 그같은 속성이 사람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 것이다. 새정부 출범직후 대통령이 『모든 공직자들은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쥘 생각을 버리라』고 훈시했던 것도 돈과 명예의 그같은 속성이 이제껏 우리사회 모든 병리현상의 원인이었음을 뜻한다. 여기서의 명예는 물론 「권력」의 간접적 표현이다. 그러나 악의 원인을 제공하는 요소이기는 할망정 돈과 명예를 이 사회에서 깡그리 추방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그것이 밝은 사회를 지향하는 첩경이 될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무인도나 첩첩산중에서 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각자 사회속에서 제격에 맞는 존재가치를 보여야 하고 그 존재가치를 보이기 위해서는 돈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돈이나 권력은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를 구성하는 절대적인 요소로서 존재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돈과 권력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이미 사회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의욕상실증 사회확산
새정부가 들어선 이후 3개월동안 개혁태풍과 사정한파가 거세게 몰아닥치면서 돈과 명예를 바라보는 일반의 시선이 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이 사실이다. 그 달라진 시선들은 대체로 두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인데 돈 많으면 뭘하고 권좌에 오르면 뭘하느냐」는 윤심덕류의 허무주의를 보이는 계층이요,다른 하나는 인간 만사를 「새옹지마」로 보는 계층이다. 당초 개혁이나 사정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던 사람들조차 이들 두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미래에 대한 젊은이들의 야망이 점점 퇴색해가고 있다는 대학교수들의 이야기도 귀담아 들을만 하고,마땅히 중요한 위치에서 능력을 발휘해야할 사람들이 「새옹지마」를 들먹이며 「나서지 않고 조용히 살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시대의 새로운 풍속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추세로 나가다가는 언젠가는 정계·관계의 자리들이 텅텅 비게 될는지도 모른다」거나 「앞으로는 시원치 않은 사람들만이 요직에 앉게될 것이다」는 농반진반의 극언들도 마냥 예사로 들리지만은 않는다.
개혁에 대한 지지율이 90%이상으로 나타난 몇몇 여론조사의 결과를 자랑하는 위정자들은 돈이나 권력에 대한 이같은 달라진 시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자리」차지하거나 「한밑천」잡는 것을 이 세상 사는 재미요,목표라고 생각했던 일반적 풍토가 사라지는 기미를 보이는 것이 아니냐는 논리다.
문제는 돈과 권력에 대한 가치관이 제로에 육박하게 되면 결국 사회의 모든 가치관은 마멸되고 만다는데 있다.
○개혁·사정부작용 우려
돈이나 권력이 삶의 모든 것은 아니라 해도 그것을 목표로 삼고 열심히 뛰는데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음 시대를 떠맡게 될 젊은 세대로 하여금 야망을 버리게 하거나,유능한 인재들을 숨어살게 하는 개혁이나 사정에 점수를 준다면 몇점을 주어야 할는지 곰곰 생각하게 한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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