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아슬 ‘굽’의 유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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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23면

10cm를 넘어, 20cm까지 치솟는 굽

몇 시즌 전부터 패션쇼는 어떤 스릴러 영화보다 아슬아슬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10㎝를 넘어 20㎝에 가까운, 때로는 20㎝를 훌쩍 뛰어넘는 높은 굽에 몸을 의지한 채 걷는 모델을 볼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무렇지 않은 척,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지만 발 쪽으로 모든 신경을 쏟고 있는 게 역력히 드러나는 모델들은 적지 않은 수가 무대에서 넘어지거나 균형을 잃고 팔을 휘젓는, 우아하지 못한 몸짓을 보이고 만다. 순간 객석은 웃음바다가 된다. 그러나 관객들은 금세 웃음을 거두고 모델을 향해 응원의 박수와 함성을 보낸다. 죽마(竹馬)만큼이나 높은 구두를 신고 걸음을 옮기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으므로.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이 현실에서 일어날 리 없는 SF영화가 아니라 패션쇼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순종적이지 않은 신발 덕에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있는 모델의 모습이 머지않아 자신의 모습이 되리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찾아올 즈음이면, 패션쇼는 스릴러를 넘어 호러 영화로 돌변한다. ‘맙소사! 내 발목이 저 신발을 견딜 수 있을까? 자칫 잘못하다간 부러지는 게 아닐까?’

2년여 전부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졌던 굽은 이번 가을·겨울 시즌에도 지상으로 내려올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변화가 있다면 형태다. 남자들로부터 적대적인 평가를 받아온 플랫폼(일명 ‘통굽’·발의 앞부분에도 굽을 덧대 신발 전체의 높이를 높게 만든 신발)의 시대와 바늘만큼이나 길고 뾰족한 킬러 힐(굽이 길고 뾰족한 스틸레토 힐보다 높아진 신발)의 시대는 가고, 좀 더 절충적인 형태인 청키 힐(두껍고 둔탁한 느낌을 주는 굽 모양)이 유행할 전망. 이번 시즌, 많은 브랜드에서 내놓고 있는 청키 힐은 다행히 플랫폼보다는 발목을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고, 스틸레토에 비하면 균형 잡기가 한결 편하다. 10㎝가 훌쩍 넘어가는 굽의 높이는 여전히 부담스럽지만 말이다.

노트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대학 신입생이 아니라면 플랫 슈즈는 잠깐 잊어도 좋다. 전설의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나 진 할로를 떠올리게 만드는 1940년대 할리우드식 글래머러스함과 70년대 클래식 스타일이 돌아오면서 플랫 슈즈의 인기는 주춤할 전망이니까.

굽에 담긴 디자인의 미학

지난 시즌 루이뷔통에서 내놓았던, 웅장하면서도 유연한 곡선 굽을 기억하는지. 구두굽이라기보다 갑자기 지구로 떨어진 미확인 생물체의 등뼈나,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건축구조물 뼈대에 더 가까워 보였던 그 굽 말이다. 위쪽은 사각형, 아래쪽은 완벽한 원뿔형으로 굽을 이등분해 놓았던 프라다의 신발은 또 어떠했나. 구두 전체의 컬러를 블랙으로 통일하고 굽의 일부분에만 퍼플이나 레드 같은 포인트 컬러를 입혀놓았던 프라다 신발은 사람들의 시선이 앞 코나 발등이 아닌 굽으로 향하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 이처럼 구두 트렌드에 있어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사실은 한동안 미개척지처럼 내버려져 있었던 구두 굽에도 다양한 디자인이 도입되고 있다는 것.

브랜드들이 구두 굽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여성들이 구두를 전체 룩을 완성하는 하나의 액세서리가 아닌, 자신의 스타일을 표현하는 특별한 도구로 여기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보다 특별한 구두를 향한 ‘슈어홀릭’(인기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 브래드쇼로 대변되는 구두중독자)의 열망이 브랜드로 하여금 굽 모양까지 완벽하게 아름다운 신발을 만들게 한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물론 여기에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브랜드 고유의 프린트나 로고를 십분 활용해 브랜드 이미지를 공고히 하면서 매출 증대까지 꾀할 수 있는 핸드백 디자인과 달리 신발에서는 브랜드 고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았던 것. 그런 상황에서 구두의 굽은, 트렌드나 함께 매치하는 옷에 따라 쉴 새 없이 디자인을 바꾸어야 하는 다른 요소들에 비해, 브랜드가 갖고 있는 아이덴티티를 표현하고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캔버스가 되어준다.

건축물의 뼈대보다 더 건축적인 굽을 지난 시즌 선보인 루이뷔통의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는 이번 시즌에는 자신이 디자인한 모든 여성용 신발의 굽을 한 가지로 통일함으로써 다시 한번 굽에 대한 독특한 철학을 드러냈다. 신발의 컬러나 디자인에 관계없이 그는 모서리를 둥글려 완벽한 원통형으로 깎기 직전의 사각기둥 모양의 굽만을 사용했다. 네덜란드의 유명 화가 얀 베르메르에게서 컬렉션의 영감을 받은 그는 신발 디자인에도 네덜란드 전통 신발의 느낌을 가미했는데, 미끈한 원통형의 굽은 뭉툭한 앞 코를 가진 신발에 모던한 느낌을 더해줌으로써 루이뷔통의 신발 컬렉션이 ‘구경하는 컬렉션’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아 주었다.

상업성과 예술성 사이를 오가는 절묘한 균형감각을 자랑하는 미우치아 프라다 역시 원통형의 청키 힐을 선택했다. 그러나 밋밋하고 평범한 굽을 내놓는다면 프라다가 아니다. 프라다는 힐을 바깥쪽으로 약간 휘어진 듯한 느낌으로 구부려 곡선으로 디자인함으로써 재기 발랄함과 클래식함을 동시에 만족시키고 있다. 지난 시즌의 뾰족하던 힐에 비하면 신기에도 훨씬 편할 것 같다.

패션 브랜드 사이에 굽 전쟁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샤넬은 구두 굽에 진주를 장식하는 등 구두 굽을 보다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것은 ‘진정한 럭셔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법’이라는 브랜드 창시자 코코 샤넬의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이번 시즌 샤넬은 좀 더 고전적인 방식으로 굽을 장식했다. 칼 라거펠트는 전형적인 원뿔형 하이힐의 뒷부분에 금빛 크리스털을 촘촘하게 박아 우아한 광채를 뿜어내게 만들었는데 `몬테카를로 컬렉션`에서 선보였던 모래시계형 골드 힐에 비하면 한결 여성스러운 느낌이 묻어난다.

컬렉션을 준비하기 전 떠났던 일본 여행에서 영감을 받아 사무라이와 게이샤를 떠올리며 신발을 디자인했다는 디올의 존 갈리아노, 브랜드의 아카이브를 찾아 이번 컬렉션 의상과 가장 잘 어울리면서도 현대 여성들에게 가장 적합한 디자인을 되살렸다는 살바토레 페라가모, 매니시함과 여성스러움이 동시에 녹아 있는 컬렉션에 어울리게 스펙테이터 펌프스(신사화를 변형한 것 같은 디자인의 여성용 신발로, 앞부분에 구멍장식이 있고 발등을 끈으로 여미게 되어 있는 캐주얼한 신발)를 거친 듯하면서도 귀여운 느낌으로 변형한 구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브랜드의 다양한 신발들이 다양한 굽으로 여성들을 유혹하고 있다.

처음 등장했을 당시인 16세기의 하이힐은 거친 말을 보다 손쉽게 다루기 위해 발명된, 남자들을 위한 물건이었다고 한다. 여권 신장과 굽 높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숱한 논란, 페티시즘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여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베트 미들러의 말처럼 여자들이 원하는 것은 적절한 하이힐 한 켤레일 뿐. 그리고 이번 시즌이라면 ‘적절한’이란 단어는 이런 구절로 대치될 수 있다. ‘굽이 아름다운’!

심정희씨는 패션 리더를 위한 전문지 `W`의 한국판 `W Korea`(www.wkorea.com)의 패션 부문 에디터로 ‘더 고급스러운 무언가’와 ‘패션과 트렌드를 보는 색다른 시선’을 원하는 이들을 위해 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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