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차관 판공비 허리띠 졸라매기 바쁘다|새 정부 출범후 부처마다 긴축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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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황인성 국무총리는 5월 15일 취임 후 처음으로 출입기자들에게 오찬을 베풀었다. 식탁에는 비빔밥이 올라왔다.
『예전에는 한식이든 중국식이든 이런 자리에는 1인당 4만 5만원 짜리였으나 이제는 음료수를 포함, 1인당 1만5천원을 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총리실의 관계자가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총리가 여러 달을 별러온 접대」치고는 소박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총리실은 이것마저도 각별히 배려한 것이라는 얘기다.
『줄일래야 줄일 수도 없는 인건비를 포함, 전 예산의 16%이상이나 운영경비를 삭감했습니다. 그러니 자연 판공비 명목의 운영비에서 35%이상을 감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운영비 35%절감>
총리의 경우 다른 부처의 장관들과 달리 국정활동 수행비라는 항목의 판공비가 있다. 구포 열차 전복사고등 각종사건사고의 위로금이 이 항목에서 지출된다. 이같은 위로금 등을 포함, 총리실에는 연간 6억5천만원의 판공비가 할당돼있다. 지난해의 10억원에서 3억5천만원이 줄어든 것이다.
예산절감 때문일까. 총리실은「국민과의 대화」라는 지방순시를 생각도 못하고 있다. 외빈 접대의 경우 점심은 종합청사구내식당, 저녁자리는 주로 공관에서 간략하고 검소하게 치른다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특히 황 총리는 경리장교 출신답게 어디서나 돈 관리에는 공·사가 엄격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3개월에서 6개월마다 한번씩 해오는 건강진단 비용은 반드시 개인주머니에서 지출한다.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경제기획원은 각 부처의 예산가운데 12.2%를 일괄적으로 절감해 중소기업 지원자금 등으로 쓰기로 했다. 이에 따라 각 부처는 인건비 등 경직성경비보다는 허리띠를 졸라맬 수 있는 곳에서 절감해 나가야했고 자연히 특별판공비 등 선심 쓰고 먹고 마시는 규모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어진 것이다.
지난 4월초 국무회의는 장관들이 어떻게 불요불급한 씀씀이를 줄여 나갈 것이냐를 논의했다. 각종 경조사에는 5만원 이하의 경조환으로 대신하고 접대용 점심 저녁은 봉사비를 포함, 1인당 3만원미만으로 하며 격려금·위로금은 자제하는 한편 접대비 명목의 돈은 신용카드로 지출토록 의견을 모았다.
어느 부처나 장·차관들의 씀씀이가 빡빡해져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예산절감도 절감이지만「자가 발전」을 통해 마련했던 통로도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이른바「물이 좋다」는 경제부처도 예외는 아니다. 얼마전 상공부관리들이 우수수 구속된 뒤에는 아예 엄두도 못 내고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음성적 정치자금을 거부하고 있는 마당에 기업의 돈에 눈을 돌릴 만큼 목이 굵은 장·차관들은 없다.
이경식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은 국회 경과위 소속 상임위원들과 상견례 겸 저녁식사를 하며 1인당 2만5천원 하는 음식점을 찾았고 지난달 김만제·이승윤 전부총리와 MBC토론회를 마치고 간 일식집에서는 넓은 방을 차지하고도 매운탕만 들고 나와 주인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예전에는 판공비가 모자라면 손쉽게 예산을 전용해 쓰기도 했지만 고통분담에 솔선수범 해야 할 요즘 들어서는 어림없는 일이 됐다. 5월12일 일본 방문도 일정을 1박2일로 줄였고 수행원도 4명으로 최소화하는가 하면 각종 경조사비 지출은 5만원을 넘기지 않고 있다.

<접대비는 카드로>
홍재형 재무장관도 장관실의 기본 판공비에다 각 국의 판공비 가운데 20∼30%씩 쪼개서 보내주는 돈까지 모아 월 5백만∼6백만원을 쓰는데 경조사에 조금 보태면 남는 게 없을 정도라고 한다. 최근에는 장관실의 경비를 줄이기 위해 사무관급 비서 한 명을 줄였고 고향의 국민학교에 기증하는 컴퓨터는 사비로 샀다. 장관이 워낙 손이 작아 현재로서는 별문제 없으나 역대 장관들이 남긴「빚」에 대해서는 골머리를 앓고 있다.
김철수 상공자원부장관은 통상장관의 특수성이 있어 달마다 정보비와 판공비를 쓰는 규모는 들쭉날쭉 이다. 예컨대 외국의 통상장관과의 회담이나 순방, 또는 외국의 대형 수입상과의 만남 같은 경우 한끼 식사대접에 3만원을 넘지 말라는 기준을 지키기 어렵다. 그러나 이 같은 특수성에도 제약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획원이 지난 1일 각 부처에 시달한 93년도 세출예산 집행관리지침에는 종래 장관이 해외에 나가 외국손님을 대접할 때 한 나라에서 1인당 70달러를 기준으로 2천1백 달러에 한해 대접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1인당 50달러를 기준으로 1천5백 달러 한도에서만 쓸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상공자원부의 경우 그동안 무역특계 자금을 쌈짓돈처럼 이용해왔으나 무역특계 자금 파동이후 이마저 매우 조심스러워졌다.
고병우 건설장관은 지난3월 장관으로서의 첫 월급을 타가지 못했다.
명세표만 받았다. 취임 후 잇따른 정부인사에 요직이나 산하기관에 등용된 지인들에게 화분을 빠지지 않고 보내고 직원들의 경조사에도 성의를 표하다보니 월 7백만원 가량의 판공비로는 턱없이 모자랐던 것이다.

<월급 거덜나기도>
이에 따라 건설장관실은 경조사비용을 반으로 줄이고 난초대신 축전으로 하는 등 살림살이를 최대한 줄여가고 있으나 장관의 얼굴이 워낙 넓어 비서실은 울상을 짓고 있다. 오랜 연구원생활로 근검절약이 몸에 밴 허신행 농림수산부장관도 점심은 물론 저녁까지 과천 청사의 구내식당을 자주 이용한다.
부처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내무부의 경우 새 정부출범이후 판공비 총액이 20%가량 삭감됐다. 예전 같으면 장관의 시·도 초도순시 때 1백만원 안팎의 격려금을 내놓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해귀 장관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전경위문방문·민원실방문 등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예 격려금 봉투를 없앴다. 그나마 전경위문 등에도 봉투의 두께가 얇아져 20만∼30만원 선이 고작.
내무부의 판공비는 주로 각종 대형사건사고의 위로금에 뭉칫돈이 들어가는 형태를 띤다. 그래서 풍수재해가 발생하는 여름철에 판공비 소요가 집중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한다. 부산 열차사고 때는 2백만원, 공주 정신병원화재 때는 3백60만원을 위로금으로 지급했다.
그러나 시국치안에 민감해야했던 시절에는 경찰청 등으로부터 정보비를 지원 받아 비교적 풍족하게 썼다고 한 관계자가 귀띔. 15만 경찰조직의 총수인 경찰청장은 월 3백10만원을 판공비로 지급 받고 있다. 그러나 예전에는 부정기적으로 대통령이 쥐어주는「통치자금」까지 포함, 돈에서만은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지방순시나 산하부대방문 등의 과정에서 일절 돈을 쓰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오면서 이른바 통치자금도 없어졌다.
차관회의의 결정을 따르면 경찰청장은 경조사에 3만원이상을 쓸 수 없게 돼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최하 10만원대로 해오던 것이라 우선 5만원으로 줄이는 등 예산에 정해진 판공비 안에서 짜 맞추려 노력하고 있다.
교육부장관의 경우 특별판공비를 포함, 월 1천여 만원선에서 판공비를 운영한다. 대학생들의 시위가 정권의 관심사였을 때는 안기부 등을 통해 지급되던 격려금이 있었으나 올 1월부터 안기부 파견직원의 출입이 정지되면서 끊겨 버렸다. 아울러 각 대학·직속기관·단체 등에서 개인적으로 보태주던「용돈」도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끊겨 버렸다는 후문.
그러나 해직교수 출신의 오병문 장관은 거의 돈을 안 쓰는 형이어서 큰 어려움은 없다는 게 관계자들의 얘기. 특히 국회 교육위원회의 조순형 위원장은 장관등 교육부 관계자들과 국회 구내식당을 이용하고 조위원장이 오장관보다 더 자주 지불하기까지 하는 형편이다.
과거 J모 장관의 경우는 물러날 때 상당한 액수의 판공비를 미리 당겨 지출해 후임자의 비서관이 몹시 고생을 해야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복지시설등에 지원>
환경처의 경우 연간 3천6백여만원인데 황산성 장관이 저녁 식사를 꺼리고 경조사에 보내는 돈의 액수도 줄여 오히려 장관의 판공비가 남아 사회복지시설 방문 등에 집중적으로 쓸 계획이다.
장관의 판공비는 원래 부임 초나 예정된 퇴임에 뭉텅 쓰인다. 따라서 보사부의 경우 금년 안필준 장관에 이어 박양실·송정숙 장관까지 바뀌며 올 판공비의 절반이상을 지출한 상태라고 한다.
5만6천여명의 대식구를 거느리고 있는 서울시장의 경우 판공비의 수준으로만 보면 월2천8백여만원으로 어지간한 부처 장관의 서너 달치 판공비에 해당한다. 이처럼 많은 판공비 때문에 역대 어느 시장은 부임 초 한달 분의 판공비규모를 설명 받고『이게 1년치냐』며 깜짝 놀라기도 했다.
시청의 업무가 워낙 많은 대민 행정을 다루다보니 과거에는 시장의 뒷돈을 대줄 수 있는 줄을 잡기도 어려웠고 자연히 시장의 씀씀이는 제약이 없었을 정도라고 관계자들은 귀띔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같은 관행이 거의 사라졌고 아울러 일선구청이나 동사무소를 방문할 때도 격려금을 내놓는 일이 크게 줄었고 그나마 10만원을 넘기는 사례가 많지 않다고 한다.
장·차관들의 판공비는 크게 기관운영판공비·정보비·특별판공비 등으로 구성된다.
월 1백40만원에서 85만원안팎의 기관운영비는 부처에 따라 다르지만 주로 비서실의 운영비로 충당하고 정보비와 업무추진비 명목의 특별판공비가 흔히 말하는 판공비의 범주에 들어간다.

<연 4∼5천만원>
부처에 따라 사정은 다르지만 대체로 이같은 기준에서 보면 각 부처 장관의 판공비는 연간4천만∼5천만원 선이 공식적인 것이라 할수 있다.
특별판공비는 외빈의 초청경비, 회의시의 식음료대·접대비등으로 정보비는 경조사비나 격려금 등의 항목으로 쓰인다.
『한달에 6백만원은 그렇게 많지 않은 액수입니다. 꼭 써야 할 곳에 썼는데도 6백만원이 모자랐습니다. 예산으로 배정되는 돈으로만은 모자라 특혜를 주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좋을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80년대 지방 중소도시의 시장을 지냈던 한 전직 내무관리의 고백이다.
그렇다면 각 부처의 장관들은 지금 80년대 지방 중소도시의 시장이 썼던 것보다 적은 판공비로 고생하고 있는 중이다.
판공비의 규모나 조달방법이 스스로 밝히는 것과 똑같았을 것이라는 믿음은 선뜻 가지 않는다. 그러나 요즘 관가 주변음식점들에는『문을 닫아야겠다』는 엄살이 끊이지 않는다. <이재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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