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수-오타케 제5국 관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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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16일의 응창기배 결승 제3국에서 오타케 9단은 딴사람처럼 무기력했다. 그의 유명한「미학」은 그림자도 볼 수 없었고 서봉수 9단의 매서운 공격만이 판을 종횡 무진했다. 얼마 전 일본 10단전에서 다케미야9단을 꺾고 우승하던 오타케가 아니었다. 18일의 제4국은 거꾸로 서9단이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졌다. 서봉수의「생명력」과「야성」은 간 곳이 없고 오타케의 감각만이 살아 움직였다. 점심시간도 되기 전에 대패하고 나온 서9단은『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시종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고 독백을 내뱉고 있었다.
그렇게 종합전적 2대2가 된 뒤 서9단은 이번 제5국 승부가 필생의 승부임과 동시에 끝없는 추락을 예고하는 무서운 위기임을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했다.
최종국인 제5국 전날 서9단은 일행과 떨어져 식물원의 호숫가에 앉아 바둑판을 펼쳐놓고 지금까지의 4국을 되새겨 검토했다. 가끔『내가 황금에 눈이 멀었나』하고 껄껄 웃었다.『제4국때 뼈를 묻었어야지 이제 와서…』하고 탄식하기도 했다.
해질 무렵 식물원을 떠나며 그는 힘주어 말했다.『이제 와선 어차피 기술의 승부가 아닌 심장의 승부다. 만사를 잊고 내 20년 공력을 한판에 쏟아 붓겠다.』
서9단은 덤8집이 부담스럽지만 흑을 쥐고 대모양을 펼쳐 모험을 걸겠다고 했다.
『어차피 큰 승부는 누군가의 KO로 끝난다. 한두 집이 문제가 아니다.』
20일 아침 단구의 오타케는 허리를 쭉 펴고 씩씩하게 대국장에 들어섰고 서9단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입장했다. 돌을 가려 흑백선택권을 얻은 오타케는 예상대로 백을 잡았다.
대국장 밖은 승리를 염원하는 징크스·미신·종교들로 출렁거렸다.
한 교민이『중국 달력에 5월20일은「선승」이라고 써있으니 오늘은 흑이 이긴다』고 했다. 서9단의 부인은 방에서 계속 기도를 올렸다.
초반포석은「흑성공」이라고 오청원 9단과 예내위 9단이 입을 모았으나 곧 오타케의 멋진 감각이 판을 연타했다. 여기에 휘말려 서9단은 서서히 헤어나올 수 없는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나 점심식사 후 유리한 오타케 쪽에서 자중의 빛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고삐를 늦추는 순간 서9단의 승부수가 연이어 터졌다. 오타케9단은 기백이 뛰어난 노장이었으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오자 마음이 약해졌고 난전에 강한 서9단은 절망에 처하자 예의 야성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바둑은 혼미에 빠졌고 오전동안 거의 노타임으로 두어가던 오타케가 이때부터 장고를 거듭했다.
그런데 돌연 오타케의 손이 빗나갔다. 항시 선수라고 믿었던 곳을 무심히 두었는데 그게 착각이었다. 순간 중앙의 백대마가 함몰하면서 바둑도 끝나버렸다. 기적적이고 극적인 반전이었다. 승리 후 쓰러질듯 대국장을 나선 서9단은『사경을 헤매다가 극적으로 승리했다』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서9단이 비세를 딛고 승부를 혼미로 몰아 넣어가던 과정은 모두가 찬탄할 만큼 대단한 기세였다.
제5국은 서9단의 말대로「기술이 아닌 심장싸움」이었다. 그 싸움에 서9단이 이긴 것이다.
서9단은 거대한 응창기컵에 40만달러짜리 수표를 받고 수백 명의 축하를 한 몸에 받았다. 싱가포르의 소년기사들이 떼지어 서9단에게 몰려들었다. 환호와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싱가포르=박치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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