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 수사 “이젠 그만”/고개드는 정치권 불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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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원칙·기준없는 한풀이 사정 인상”/민주계선 “수구세력의 불평일뿐”
사정과 관련해 정치권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당초 사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의해왔던 입장이 점점 후퇴하고 불평·불만이 차츰 고개를 들고 있다.
특히 민자당의원들 중에는 『언제까지 사람치는 일에만 몰두할 것인가』라며 질린 표정을 짓는 이들이 부쩍 늘고 있다. 또 민주당의원들 가운데서도 사정의 형평성에 대해 문제삼으면서 『이제 그만』이라는 메시지를 넌지시 던지는 이들도 생겨나고 있다.
물론 의원들은 아직까지 이같은 마음가짐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있다. 김영삼대통령이 중단없는 부정부패 척결을 강조하고 있고 이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여전히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자당의 민주계에서도 뭔가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고 청와대내에서도 사정의 한계와 방법론을 둘러싸고 이견이 표출되는 양상이다.
○뒤숭숭한 의원들
우선 의원들의 생각이 바뀌는 가장 큰 이유는 불안심리 때문이다. 슬롯머신 사건과 관련,자꾸만 새로운 이름들이 나오고 수사도 계속될 기미여서 좌불안석인 것이다. 또 난데없이 어떤 사건이 불거져나와 목덜미를 조일지 모른다는 정황도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요인의 하나다.
민자당 민정계의 한 중진의원은 뒤숭숭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지금처럼 사정이 무계획적으로 계속될 경우 5,6공에서 비교적 잘나갔던 사람들은 언제 어떻게 다칠지 모른다. 청와대가 사정은 정치보복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비리에 대해서 바로잡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게 더욱 사람을 잡는 일 아니냐. 슬롯머신 사건같은 엉뚱한 사건이 또 터져 언제 정치권으로 불똥이 튈지 짐작하기 어려운 판국이므로 1년내내 가슴졸이면서 살아야 할 판이다.』
민주당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찜찜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한 의원은 『현재 사정기관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는 형국인데 우린들 편안하겠느냐. 더욱이 박철언의원 경우에서처럼 표적수사가 이뤄지는 인상인만큼 사정의 칼날이 민주당의원을 표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고 말했다.
○형평성문제 제기
그는 『현정권이 슬롯머신 사건 연루자로 우리당 사람들의 이름을 은근히 유포,당에 상처를 입히고 있다』고 주장하고 『앞으로 이 사건을 매듭지을 때 우리 동료를 끼워 넣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당내에 팽배해 있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사정에 대한 불평·불만은 또 사정의 방식·방법에 관한 문제제기 차원에서 나오기도 한다. 즉 『사정이 일정한 원칙과 기준없이 이뤄지고 있어 결국 나라안정과 경제발전을 저해하고 말 것』이라는 시각이다.
민자당의 한 민주계 의원은 『맨처음 국민에게 통쾌하다는 인상을 주어 인기를 끌었던 충격요법식 사정은 이제 재고해 볼 시점에 다다랐다. 왜냐하면 벌써 식상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고 지적한다. 그는 『앞으로 사정은 요란을 떨지말고 어떤 원칙과 기준에 맞춰 보다 계획적이고 조용히 진행돼야 한다. 또 그래야 아군의 피해도 적게 된다』고 강조했다. 민정계와 민주당은 보다 비판적이다. 재선인 한 민정계 의원은 이렇게 주장한다. 『사정이 잘못된 길목으로 들어선 것 같다. 즉 군에 대한 사정이 형평성에 어긋나는 듯하더니 동화은행 사건과 슬롯머신 사건을 처리하는 것을 보니 정말 문제가 많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현재의 사정은 앞날을 설계하는 기초를 닦는 차원에서 이뤄진다기 보다 한풀이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듯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그는 또 슬롯머신 사건과 관련,『자꾸 익명의 이름들이 흘러나와 거의 모든 의원들이 유언비어에 시달리고 있다』면서 『사정당국은 정말 누가 비호세력인지 속시원히 밝히는 등 맺고 끊는 맛이 있어야 정치권이 진짜 정치에 신경쓸 수 있다』고 충고했다.
○핵심 민주계 불쾌
민주당의원들도 역시 동화은행 사건과 슬롯머신 사건 처리를 지목,「정치보복성 사정」이라고 비판하면서 『음모적인 시각에서 사정이 이뤄지다가는 정치도 망치고 나라도 망친다』는 말로 많은 뜻을 전달하고 있다.
지금처럼 사정이 계속되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또다른 부류는 사뭇 감정적이고 노골적이다. 민자당의 민정계의원들이 주축을 이루는 이들은 박철언의원이 드디어 사정의 그물에 걸린 것을 겨냥,『이제 목표한 사냥이 끝났으니 그만 쉬자』고 말한다.
한편 민자당의 핵심 민주계의원들은 이같은 불평·불만에 대해 불쾌함을 감추지 않는다. 이 계파의 한 당직자는 『개혁에 저항하는 수구세력이 엄연히 존재하는 마당에 사정을 적당한 수준에서 끝낼 수는 없다. 사정을 통해 정적 몇사람을 제거한다 해서 30년동안에 뿌리깊이 박힌 부정부패와 비리가 없어질 걸로 본다면 순진한 생각이거나 과거를 그리워하는 향수임에 틀림없다』고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이상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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