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집 『농무』의 신경림씨|민초의 숨결 담긴 삶을 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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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신경림 약력>
▲1935년 충북 충주출생 ▲54년 동국대 영문과 입학 ▲56년 『문학예술』추전통해등단 ▲시집 『농무』 『달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노래』 『길』 및 평론집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기행문집 『민요기행』1, 2권 등 ▲만해문학상·한국문학작가상·이산문학상 등 수상 ▲민예총 사무총장·공동의장 역임. 현 민족문학작가회의회장
파장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며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시집『농무』중에서>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뒷방에 모여/묵내기 화투를 치고/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로 시작되는 신경림씨의 시 「겨울밤」이 65년 한 일간지에 발표됐을 때 문단의 반응은 시큰둥했었다.
『시가 무슨 이야기 자락 한 토막 잘라놓은 것 같아 도무지 시답지 않다. 저 친구 한 10년 쉬더니 머리가 좀 이상해 진 것 아니냐』는 반응들이었다. 그러나 신씨가 그러한 평에 아랑곳 않고 꾸준히 같은 유의 시를 써 73년 시집 『농무』를 자비 출간했을 때 문단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것도 시일까 하는 기막힌 의구심」이 『보아라, 이제 우리에게도 이런 시집이 있다』는 환희로 바뀌어 들뜨기 시작했다.

<"민중적 경사"찬사>
6·25를 거치며 시에서 현실비판의식이 표백되고 실존주의·심리주의·관념적 서정·기교 등만 판치면서 한없이 난해해져 버린 시단에 우리 소재·가락·정서로 쉽게 울려는 진짜 우리시가 나타났다는 환호였다. 문학평론가 백낙청씨는 시집 『농무』의 출현을 「하나의 민중적 경사」로 받아들였다. 평범한 독자들에게 쉬운 시행으로 깍듯하게 예절을 지킨 「민중의 사랑에 값하는 시들」이라는 것이다.
독자 없는 난해시에 대한 쉬운 시의 승리로 평가된 『농무』는 74년 제1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
이듬해인 75년에는 『민중의 삶에 스스로를 의탁하는 작가와 작품이 끈덕지게 살아남아 승리하리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라는 민족·민중문학 진영의 첫 작품적 본보기를 보이며 창작과 비평사의 시선 제1권으로 재출간됐다.
이 시집은 이후 한해 5천부 가량씩 꾸준치 팔리고 있는 현대시의 한 고전으로 남아있다.
-56년 『문학예술』지의 등단작들에는 실존적 허무가 짙게 배어 있다. 그런 세계에서 왜 쉬운, 현실주의 시세계로 넘어왔나.
『관념적 말장난이 돼가는 나의 시에 대한 회의가 지독하게 엄습해왔다. 그래서 등단 이듬해인 57년 낙향해 10여년간 농사도 지어보고, 공사판에도 기웃대보고, 광산촌에 들어가 얼쩡거리기도 하면서 시에서는 철저히 멀어진 채 인생공부를 다시 했다

<현실적 서정 듬뿍>
그 후 상경해 10년만에 시를 잡으니 옛날 같은 이유 없이 슬픈 서정은 잡을래야 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보낸 땀 많은 세월, 그 땀냄새만을 내 비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농무』에 실린 40여편의 시는 원고지 앞에서 엮어내는 관념이나 서정이 아니라 현장에서 얻은 땀과 회한의 시들이다.
『농무』에 실린 시들은 살구꽃 그늘의 서정을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서정은 회고적 관념이나 서구적인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적 서정이다. 삶이 밴 서정과 거기 짝하는 가락·현실의식은 농부·어부·노동자·무지렁이 등 기층민중들에게도 쉽게 읽히며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시로서 유감없는 힘을 나타냈다.
『농무』의 이러한 시 세계는 좀더 첨예한 역사의식이 밴 장시 『남한강』으로 흘러들게 된다. 「새재」 「남한강」「쇠무지벌」 등 3부로 구성된 이 장시는 시인의 고향 충주를 끼고 흐르는 남한강일대를 무대로 1910년대 민중들의 반봉건·반일 투쟁에서 해방후의 문제까지를 다루고 있다.
-독자들에게 쉽게 읽히는 시가 쓰는 입장에서는 더 어려울 것이다. 어떤 창작과정을 거쳐 그러한 경지에 도달했는가.
『민요·판소리 등 우리의 전통적 가락을 활용하려 애썼다.
사실 쉬운 시에서 드러나지 않은 형식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정선아리랑 가락을 찾아 정선으로, 뗏목꾼들의 노래를 찾아 강으로, 장꾼들의 가락을 찾아 장터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그 가락들마다 사연들은 좀 많은가. 민중들의 한이 고스란치 배어있는 노래들 아닌가. 그러나 시는 그 가락을 뛰어 넘어야한다. 그 한도 뛰어넘어 오늘의 현실을 드러내야 한다. 민중의 핏속을 흘러온 가락과 현실의식을 접목시키는 데에는 그만한 어려움이 따랐다.』
시집 『농무』가 10년간 그가 떠돌았던 농촌·광산 등 현장에서 나왔듯 그의 시들은 현장을 따라 다닌다. 한반도 반쪽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민요가락을 듣고 살아있는 민초들의 숨결을 듣는다.
한 달이면 두서너 차례 한일주일씩 그렇게 떠돈 기행을 묶어 그는 『민요기행』2권과 함께 그 길 위에서 만난 민초들을 노래한 시집 『길』을 펴내기도 했다. 그러나 신씨의 「길 위의 문학」은 한반도 곳곳에서 이루어지면서도 어김없이 민주화의 한 복판을 관통해왔다. 그동안 그는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민예총공동의장 등을 맡으면서 재야 운동권 예술을 주도했다.
-80년대의 민중시들이 오히려 민중정서와는 멀어졌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민중문학을 이끌고 있는 한사람으로 어떻게 생각하는가.

<전통적 가락활용>
『일정한 시적 훈련을 안 거친 젊은 시인들이 과격한 목소리만을 가지고 나온 탓이다. 민중시라도 우선 시는 시여야 한다. 나는 시대적 상황이 잘 반영된 서정시를 쓰려 노력했지 이념을 앞세운 시를 쓰려하지는 않았다. 민중시가 큰 흐름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서를 먼저 익히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현실을 현실대로 나름의 정서를 갖고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재야운동도 하고 문학도 해오면서 시대적 진실과 문학적 진실 사이의 괴리를 느끼지는 않았나. 잎으로 어떤 시를 쓸 것인가.
『운동은 허풍도 필요하고 쇼맨십도 필요하다. 그러나 작품으로서 남는 문학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시대적 진실을 위해 80년대에 뛰쳐나온 젊은 시인들의 행위는 물론 필요했고 민주화에도 크게 기여했다고 본다.』
그러나 시대적 사명에 너무 투철한 나머지 시적 진실에는 허름한 시인들도 많았다..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의 「파장」이나 「폐광」 등에서처럼 나는 막을 내리고 스러지는 것들에 기질적으로 친밀감을 갖고 있다. 타고난 나의 이 기질에 충실하며 민초들의 건강한 삶의 모습과 정서를 그들의 가락으로 노래해 나가겠다.』
인터뷰를 끝낸 신씨는 강원도 원주로 떠났다. 길 위의 사람들과 자연을 만나기 위해서다. 20년 전에 춘 『농무』는 즐거운 한바탕 춤이 아니라 조합골방에서의 대책 없는 시름에 찬 춤이었다. 현실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전통적 가락에 얹고 있는 신씨의 시들이 신명난 「농무」가 될 날을 기약하며 신씨는 아직 운동과 시의 길 위에 있다. <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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