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무형문화재 1호 김병하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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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앞남산 딱따구리는/생나무 구멍도 파는데/우리 집에 저 멍텅구리는/뚫어진 구멍도 못 파나/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오.』
하늘이 세뼘 밖에 안돼 해뜨자 해진다는 강원도산골 정선사람들의 한과 정서, 그 중에서도 애정과 해학이 가장 두드러지게 스며있는 정선 아리랑.
그 정선아리랑에 빠져 20여년을 오직 정선아리랑의 발굴과 보급에 쏟아버린 김병하씨(49·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봉양8리6반).
요즘 그로부터 정선아리랑을 듣고자 정선을 찾는 사람이 대학생에서 할아버지까지 많을 때는 한 달에 40여명, 적어도 10여명은 된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들을 마다하지 않는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먹여주고 재위주지 못하는 것이 가슴 아플 뿐 정선아리랑을 듣고 배우고자 산간오지까지 찾아준 것만도 고맙게 여길 따름이다.
그가 강원도 무형문화재 1호인 정선아리랑의 창기능보유자로 지정이 돼 인정을 받게된 것은 지난 84년.
그전까지만 해도 누구도 그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 정선아리랑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고 나돌아다닐 때는 주위에서 미친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기 일쑤였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정선아리랑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다 퍼다주고 식구들은 굶어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 그럴만도 했으리라.
또 어쩌다 목청 좋은 사내를 만나면 그가 사는 골짜기까지 쫓아가서 권유하고 가르쳐야 직성이 풀렸다.
한번은 정선아리랑을 위한 공연을 사북에서 열었다.
사람들을 끌기 위해 빚을 내 서울의 내로라 하는 명창들을 찬조출연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초겨울 때아닌 혹한이 닥쳐 폭삭 망하고 2백만원의 빚만 지게 됐다.
그가 그렇게 정선아리랑에 미쳐 살 때 그의 아내는 벽지 새마을공장 직공으로 근근히 생활을 이어 가면서 4남매를 키웠다.
그러던 그가 세상에 제법 알려지게 된 것은 82년 시인 신경림씨를 만나고 나서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아리랑을 찾아 「민요기행」을 하던 신씨는 정선에서 김병하씨를 만나고는 그의 민중의 한과 정서가 담긴 정선아리랑의 구성진 소리를 세상에 소개하게 된다.
그가 정선아리랑에 남달리 애정을 갖게 된 것은 태어나 살아온 과정과 뗄래야 뗄 수 없다.
그는 정선아리랑을 배운게 아니라 몸으로 체득한 사람이다.
하루종일 사람 그림자조차 구경하기 어려운 두메산골인 정선군 북면 고양리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부모가 산에 일하러 가면 하루종일 산골 외딴집에서 혼자 놀아야 했다.
들리는 것은 오직 뻐꾸기 소리뿐일 때 산비탈 묵정밭을 갈며 시름에 겨워 부르던 어머니의 구슬픈 아리랑 가락은 훗날 그가 평생을 정선아리랑과 함께 살도록 하는 끈이 됐다.
『아직도 어머니의 창을 쫓아갈 수는 없습니다. 정선아리랑은 마음과 마음이 어우러져 나오는 토속적인 민요입니다. 소리는 가르칠 수 있지만 마음까지는 가르칠 수 없습니다.』
정선아리랑은 처음 들으면 느리고 힘이 없는 소리인 듯 하지만 보이지 않는 영혼의 힘이 있어 굶어 죽을 상황이 닥쳐도 스스로 일으켜 세우는 마력이 있다고 한다.
그 역시 다시 생각해도 어렵기만 하던 옛날의 가난을 아리랑을 통해 극복했다.
정선아리랑은 그 부르는 층이 매우 두텁고 전승지역도 역시 거의 강원도 전역에 걸쳐 있다.
남자가 부르거나 정치적인 내용의 가사보다는 여자가 부른 것이 대부분이고 내용 또한 음담패설이 주종을 이룬다.
정선아리랑은 또한 가사가 매우 풍부한 민요로 현재 채록이 된 것만 해도 5백여종이 되지만 실제 7백여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씨는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수십종의 가사도 발굴, 채록해 보관하고있다.
그는 정선아리랑 외에 강원도토속에도 남달리 애정을 갖고 있다. 그가 발굴한 『지게춤·물박장단』은 91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시연되기도 했다.
그의 창솜씨는 지난 84년 한라제 전국민요경창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할 만큼 일품이다.
이따금 그의 소리가 아까워 서울에서 다른 민요도 하면서 먹고살 일을 도모하라는 선배 명창들의 간곡한 권유도 있지만 정선아리랑이 정선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면 이미 정선아리랑이 아니라는 그는 정선아리랑의 원형을 변절됨이 없이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골짜기에 움막 서너채를 지어 정선 산골의 삶을 재현하고 그곳에서 정선아리랑을 전수하는게 꿈입니다.』
그는 온몸으로 배워야 정선아리랑의 정수를 체득할 수 있다고 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은 밭을 갈고 옥수수를 따는 「자연과 노동」속에서만 전수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현재 그는 전수생이며 이웃인 신기선씨(42) 집을 빌려 이틀에 한번씩 정선아리랑 배움의 시간을 갖는다.
또 지난해에는 정선에 사는 전수생 15명이 모여 「김병하 아리랑 전수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는 아직도 월세 5만원의 임대주택에서 살지만 정선아리랑과 함께 하는 생활이 결코 힘들지 않다고 했다.
그의 장녀 김길자씨(32)도 정선아리랑 전수 장학생으로 선정돼 정선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의 대를 잇고 있다. 【정선=이순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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