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태풍… 은행장 수난/율산·이­장사건때와는 성격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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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은행경영 실질적 자율보장 시급
예나 지금이나 무슨 일이나면 가장 「다치기 쉬운」 자리 중의 하나가 은행장이다.
행장까지 오르기 위해 들여야하는 인적·물적 노력과,행장이 된뒤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의 크기에 비하면 대형 금융사고나 개혁 사정의 회오리에 휩쓸릴 때의 행장자리는 참으로 보잘것 없다.
경제사건은 물론이고 웬만한 정치사건이나 사회사건의 배경에는 항상 「돈 줄」이 얽혀있게 마련이라 금맥을 다루는 자리인 은행장이 물려들어가지 않는 경우가 드물며,정치권의 실세들과 최소한의 교분은 유지해 놓아야 했던 것이 행장 자리지만 일단 일이 나면 정치인들과는 달리 별다른 방패막이도 없는 것이 또한 행장 자리기 때문이다.
또 금융의 「공공성」이 유달리 강조되어 온 터라 과거의 예를 보면 정부가 「딱 떨어지는」 공인에게 책임을 묻기 뭐할 경우 「준공인」으로서의 은행장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도 종종 있어 금융계 뒤켠에서는 「속죄양」이라는 시각을 갖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과거 행장들이 줄줄이 그만 두거나 구속당했던 사례들은 대부분 대형 금융사고와 연관된 것이었지 요즘처럼 정권 교체와 함께 바로 잡기 시작한 개혁의지의 표적이 된 적은 없었다.
세인이 주목한 최초의 은행장 구속은 79년 4월 율산파동때다. 70년대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 속에서 한창 잘나가던 종합상사인 율산이 무너졌을때 당시 홍윤섭 서울신탁은행장이 업무상배임죄로 구속되었는데,정작 8년이나 지난 87년에 홍씨는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이후 5공 출범 초기인 82년 나라의 금융질서를 온통 뒤흔들어놓기에 충분한 대형 금융사고가 잇따라 터지면서 은행장들은 가장 혹독한 수난기를 겪었다.
이·장사건과 관련해 당시 임재수조흥은행장·공덕종 상업은행장(작고)이 구속되고 이어 영동개발진흥사건이 나면서 이헌승조흥은행장(작고)이 또 구속되었으며,명성사건이 터지자 주인기 당시 상업은행장이 물러났다.
당시 은행들은 크게 뒤집어 쓴 부실여신에다 행장들의 대규모 구속사태에 흡사 「흉가」분위기였으며 여론은 권력형 부정에 한데 휩쓸린 행장들을 비판했다.
그러나 법의 판결은 「매도」분위기와 거리가 있었다.
당시 업무상배임죄로 1년6개월,뇌물수뢰죄로 1년6개월 등 1심에서 모두 3년을 선고받았던 임재수 전행장은 대법원 상고를 통해 뇌물부분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고 이내 업무상배임부분도 재상고하려했으나 이미 1년6개월의 형을 살고 난 뒤여서 그냥 출옥했다.
공덕종 전행장도 업무상배임부분은 결국 무죄로 결말이 났다.
이들에 대한 무죄 판결이 금융계에 만연한 비리의 소지를 모두 덮어버릴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대형 금융사건의 와중에서 「투명한」 법 집행의 한계가 어떤 것인지는 충분히 알수 있는 사례가 됐다.
이같은 과거의 사례와는 달리 최근의 행장 사임·구속 사태는 새 정권의 개혁의지가 금융계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그 성격이 사뭇 다르다.
금융계에서는 마치 무감각한 관행처럼 되다시피한 과거의 행내 비리에 대해 은행장 등의 「사람」에 대해서만 「새틀」을 짤게 아니라 행장선임과정에서 정치권의 입김을 실질적으로 배제하고 은행경영의 실질적인 자율화를 보장하는 제도적인 「새틀」이 함께 짜여져야만 금융개혁이 성공할 수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김수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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