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자 위축되면 민이 불편/오홍근(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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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삐삐로 정답번호 알려주기와 대리시험 사례들이 적발되면서 시작된 대입부정사건이 우리를 놀라게 하더니,한술 더떠 성적이 입력된 컴퓨터 마그네틱 테이프의 조작과 OMR카드 바꿔치기를 거쳐 사태가 급기야 이 나라 대입학력고사의 출제와 관리를 맡고 있는 국립교육평가원 직원의 정답 빼돌리기에까지 이르렀다.
○잇단 비리사건에 경악
조선조 과거에도 부정은 있었고,외국에도 입시부정이 있다하나 연초부터 쉴틈없이 터져나오는 이 땅의 대입부정 충격은 마치 경악시리즈를 보고 있는 느낌을 준다. 삐삐사건이나 대리시험때만 해도 놀라기는 했으나 그것은 개인차원의 단순범죄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동기야 어찌됐건 대학당국이 학교차원에서 조직적으로 마그네틱 테이프를 조작하고 OMR카드를 바꿔치기한데서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더구나 다른 곳도 아닌 국가차원의 시험문제를 다루는 평가원에서의 부정은 입이 열개쯤 있어도 할말이 있을 수 없다. 그야말로 경악시리즈의 절정이요,구시대적 불공정게임의 극치다.
그 사건의 범인이 공무원이라는데 우리는 먼저 놀란다. 공무원도 그냥 일반 공무원 아닌 교육공무원이었다. 그것도 우리가 초·중·고교시절 존경하던 선생님들이 외경의 대상으로 삼던 장학사·장학관에 의해 범행이 저질러졌다는 점은 비통과 절망감까지 안겨준다. 이 땅의 공직자사회 기강은 물론이요,의식수준과 도덕율까지를 생각케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주목하고자 하는 대목은 교육부와 평가원의 공무원들이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이다. 문제의 김모라는 장학사가 입시문제 정답을 빼돌린 사실이 교육부의 감사로 드러난 것은 3월29일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이 교육부에 의해 발표된 것은 그 19일 뒤인 4월17일이었고 검찰에 수사가 의뢰된 것도 이날이었다. 이 19일동안 김 장학사는 집에서 빈둥거리며 놀았고 발표 전날에는 이웃에 전화를 걸어 『내일 낚시나 가자』고 할 정도로 지극히 태평스러웠다. 그는 도피 직전까지도 교육부와 평가원의 사건처리방향 등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 사건은 범행이 밝혀진 3월29일,아니면 늦어도 그 다음날쯤에는 마땅히 검찰에 수사의뢰가 들어갔어야 한다. 서로 입을 짜맞추기전에 즉각 수사가 시작돼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 법석을 떨지 않고도 사건의 전모가 훨씬 쉽게 밝혀졌을 것이다. 교육부와 평가원이 깔아뭉개며 허송한 그 19일간에 대해 거듭 주목하게 되는 것은 어떤 돌발사태가 일어났을때 공직자들이 즉각 응급조치를 하고 대책을 세워 수습을 하는 즉응태세에 문제가 있어 보이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다.
○공무원 필요이상 주눅
여기서 생각나는 것은 요즘 우리 공직자들이 혹시 필요이상으로 주눅들어있지 않나 하는 우려다.
처리방향이 명명백백한 사건을 놓고도 발표를해야 하는건지,숨겨야 하는건지,수사를 의뢰해야 하는건지 일일이 웃분의 결재를 받아 시행하려 하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솟는다는 말이다. 혹시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사정불안에 위축되고,그래서 보신에 급급한 나머지 본인의 책임아래 결단을 내려야 하는 사항인데도 머뭇거리다 에러를 범하는 사례는 없는지 살펴보자는 이야기다.
무장탈영병 총기난동사건을 보면서도 그 위기관리능력과 태세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람보」만큼이나 중무장을 한 문제사병이 부대탈영후 6시간동안 검문소투성이인 국도를 유유히 빠져나와 서울도심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무참히 살상한 사건이었다. 얼이 빠지고 넋이 나갔다해도 관계자들은 할말이 없게 돼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공무원사회 일각에서는 『밤새 안녕하십니까』라는 농담을 주고받는다고 들었다. 민원을 제한적 법규에만 맞춰 경직되게 처리하는 「문서행정」도 등장했다고 들린다.
○사정하되 사기 살려야
공직자사회가 지나치게 위축되면 당장 불편해지는 쪽은 국민들이다. 운동선수도 몸이 풀려야 좋은 성적을 내게 돼있다. 사정은 사정대로 추상같은 면을 보이되 공직자들이 위축되지 않는 그런 방안이 나와줘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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