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7가] 박찬호에 대한 기다림

중앙일보

입력

박찬호가 지난 19일 트리플A 경기서 5.2이닝 동안 홈런 2개를 포함해 10안타를 맞고 7실점하며 패전투수가 됐습니다. 그러자 인터넷에는 수 많은 네티즌들의 댓글이 달렸습니다. 아쉬움과 분발을 당부하는 격려의 글도 더러 있었지만 부진을 나무라는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심지어 '이제 은퇴하라'고 조롱 하는 '악플'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즈음 박찬호의 풍경입니다. 등판 다음엔 어김없이 되풀이되고 들이붓듯 쏟아져 나오는 비난의 성찬-. 그것은 이제 그에게 끼니 때마다 받는 밥상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팬들만 그런 게 아닙니다. 선배 격인 한국 프로야구 감독들도 그의 거취에 대해 참견합니다. '벌만큼 벌지 않았나. 지금같은 모습이라면 심각하게 본인의 거취를 생각해야 할 때다' '아니다. 최초의 한국 메이저리거가 아닌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곳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등 의견도 가지가지입니다.

박찬호가 미국 진출 후 처음으로 당해보는(?) 이런 광경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기도 했습니다.

지난 겨울 사상 최고의 돈 잔치가 벌어졌던 FA시장에서 '풍년 거지'의 차디 찬 냉대를 받고 그 끝에 에이전트 교체라는 극약처방도 내렸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마이너리그에서 '자신의 능력을 다시 한번 입증하라'는 시험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뉴욕 메츠에서 어렵게 잡은 단 한 차례의 메이저리그 등판을 허무하게 날리고서는 지금까지도 그 지루하고 가혹한 테스트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더욱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LA 다저스 시절 투수코치로 인연을 맺었던 데이브 월러스와 버트 후튼이 있는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팀을 옮긴 이후에도 형편이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는 현실입니다.

스스로도 재기의 해법을 못 찾고 있는 와중에 박찬호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벌써 7월의 달력도 몇 장 남지 않았습니다. 22일 현재 42승56패로 내셔널리그 중부조 1위 밀워키 브루어스에 13경기나 뒤져 있는 휴스턴은 이변이 없는 한 빠르면 8월 중 타월을 던질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렇게 되면 노장 박찬호에게 컴백의 기회는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박찬호가 데뷔 처음으로 단 한 경기 출장만으로 시즌을 마감한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그에게 '감 놔라 배 놔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장 집어 치우고 한국으로 돌아오라' '처가가 있는 일본에 가서 야구하라'는 악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한국 첫 메이저리거의 상징성과 그동안 쌓아 올린 것을 생각해서 명예로롭게 은퇴하라'는 조언조차도 신중 해야 합니다.

소설가 김훈은 얼마 전 낸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남한산성'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성안에서 절망과 희망은 한 덩어리로 엉켜 있었고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땅 위로 뻗은 길을 걸어갈 수 밖에 없으리.'

인용이 거창하기는 하지만 400년 전 성밖으로 나와 삼전도에서 투항을 선택한 임금이나 이제 치욕과 자존의 갈림길에 선 박찬호나 처지는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죽어서 살든 살아서 죽든 그것이 땅 위의 삶이고 길이란 것입니다.

박찬호 뿐만이 아닙니다. 이 땅의 어느 누구에게도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기 이전에 필요한 것은 그런 갈등과 고통에 대한 공감 있는 그대로의 수용입니다. 하여 선택도 오로지 그 자신의 몫이고 당연히 존중돼야 합니다. 더 이상 왈가왈부할 일이 아닙니다. 차분하게 기다립시다.

구자겸 미주중앙 스포츠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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