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역겨움의 감정 … 질병 예방위해 생겼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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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감정의 롤러코스터

클라우디아 해먼드 지음, 이상원 옮김
사이언스북스, 448쪽. 1만5000원

BBC 라디오4에서 방송된 시리즈물을 엮은 책이다. 즐거움·슬픔·역겨움·죄책감·사랑·질투·분노·두려움·희망 등 아홉 가지 감정의 비밀을 파헤친다. 책의 주장은 “감정에는 좋은 감정, 나쁜 감정이 따로 없다. 감정에 압도당하지 말고 감정을 알고 이용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별반 새롭지 않은 메시지지만, 갖은 사례와 임상 실험 결과를 ‘방송용’답게 쉽게 풀어놓은 덕에 금세 설득당한다.

 흔히 주요 감정으로는 꼽히지 못하는 ‘역겨움’도 여간 미묘한 게 아니다. 역겨움은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감정이다. 깨끗한 물 한 컵에 자기 침을 뱉은 뒤 마시라고 한다면. (침이라고는 하지만 방금 전까지 자기 입 속에 들어있던 물질이니 실제 더럽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험결과 4세 아이들은 아무 스스럼없이 물을 마셨지만 7세만 되면 어른과 마찬가지로 마시기를 거부했다. 자라면서 역겨움이란 감정을 배운 것이다. 예닐곱 살쯤 되면 과자에 침을 발라 남들이 먹지 못하게 하는 식으로 역겨움을 이용할 줄도 안다.

 역겨움의 민감도에도 남녀 차이가 있다. 역겨움 권위자 폴 로진의 연구에 따르면, 여성이 남성보다 역겨움에 더 민감하고 그 차이는 10대에 가장 높았다가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줄어든다. 그 이유에 대한 해석이 재미있다.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의 영상물 ‘놀라움에 사로잡힌 다섯 인물’. 각각 분노와 행복, 괴로움 등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사진제공=사이언스북스


 “진화론적 시각에서 보자면 이는 출산 능력과 민감도가 함께 줄어드는 것으로 자신이나 자식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적어지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어쩌면 이보다 훨씬 단순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자녀들을 돌보면서 역겨운 장면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또한 성인이 되면서 남들의 시선에 덜 민감해지고 자신이 역겨워 보일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함께 줄어든 때문일 수도 있다.”(118쪽)
 역겨움의 효용에 대한 연구도 있다. 런던 위생학 및 열대의학학교의 발 커티스는 6개 나라 사람들이 가장 역겹게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조사해 공통점을 뽑아냈다. 배설물, 인체의 일부, 썩거나 오염된 음식, 점액성 물질 등이 공통적으로 역겨움을 유발했다. 커티스는 이들 물질이 질병 매개체의 목록과 일치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래서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역겨움이라는 감정을 갖도록 진화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역겨움’ 하나를 놓고 이 외에도 “왜 아이들은 똥·방귀 같은 역겨운 이야기를 재미있어 할까” “신선한 고양이 고기를 먹는다는 생각이 역겨움을 유발하는 이유는 뭘까” “역겨움을 느낄 때 뇌는 어떻게 변하나” 등 다양한 궁금증의 답을 찾는다.  
 아홉 가지 감정을 이런 식으로 꼼꼼히 훑었으니 정보 양이 상당하다.
 “구부정하게 있을 때보다 등을 똑바로 폈을 때 기분이 좋아진다” “슬픔의 종류엔 진짜 슬픔, 상상 속의 슬픔, 재미가 섞인 관음증적 슬픔이 있다” “남자아이에게 어려서부터 ‘사나이가 울면 안 된다’고 교육하지만 만 12세까지 우는 빈도에는 남녀 차이가 없다” “무서워서 죽을 수도 있다. 로스앤젤레스 지진 때 심장마비로 인한 사망자가 평소보다 5배나 많았다” 등이 그 중 몇 가지 예다.
 매일매일을 ‘감정의 롤러코스터’에 무심히 자신을 맡겨온 사람들에게 ‘나’를 이해하는 가이드 역할을 톡톡히 할 책이다. 은근히 속편이 기다려질 만큼.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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