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일본, 해양문명 키워야 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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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1990년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야심찬 개혁으로도 회복되지 않았다. 일본이 낳은 많은 신화가 이 기간 사라졌다. 은행과 종합상사.대학.관료제도.자민당.일본의 이미지, 무엇보다 자신감을 잃었다.

하지만 나는 일본이 중요한 또 한 가지를 상실했다고 생각한다. 바로 바다다. 이는 일본의 해변을 둘러보면 알 수 있다. 해변과 해안선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모든 항구엔 콘크리트로 만든 방파제가 설치돼 있다. 이런 방파제들이 늘어나면서 동시에 우리 선조들이 바다로부터 배워온 생활과 지혜, 바다와 함께 성장해온 전통과 문화가 사라진다. 일본의 어획량은 최근 20년새 절반으로 줄었다. 일본의 수산물 자급률은 현재 53%에 불과하다. 어민의 고령화도 진행되고 있다.

경제적배타수역(EEZ)을 포함하면 일본의 국토는 37㎢에서 4백48㎢로 늘어나 세계에서 일곱번째로 큰 나라가 된다. 일본 열도는 4개의 주요 섬 외에도 수천개의 무인도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토가 넓으면 그만큼 관리 및 보호, 방위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일본의 실정은 그렇지 못하다. 해적과 밀수.마약.괴선박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국민은 바다 국경수비의 허술함을 깨닫게 됐다. 바다 국경 감각을 키워야 한다. 그 경계 너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일본은 스스로 바다 민족이라는 감각마저 잃어버린 것 같다.

비행기와 인터넷의 발전은 바다를 추상적인 대상으로 만들었다. 요즘은 배로 이동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배의 이미지는 컨테이너선이나 유람선으로 굳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인터넷 발달로 인간의 거리가 좁혀진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 거리를 몸으로 실감하는 능력은 분명 약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역사는 개국과 쇄국, 해양 지향과 내국 지향의 반복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종전 이후 일본은 개국을 서둘렀다. 이때 일본은 뼈저리게 '섬나라 근성'을 반성했다. 다시 한번 세계를 향해 일본을 열고, 여러 나라와 손잡고 훌륭한 나라가 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해양국가로서 비약하겠다는 전략구상이 세워졌다. 이는 80년대 오히라(大平) 내각의 환태평양 구상으로 이어졌고, 더 나아가 아태경제협력체(APEC)로 결실을 보았다.

하지만 일본의 해양전략은 전후 오랜 기간 태평양 중심이었다. 동해와 오호츠크해.동중국해는 거의 잊힌 바다였다. 냉전 후 북한 문제가 불거졌고, 이 과정에서 일본인 납치 문제와 북한 공작선, 노동.대포동 미사일은 일본 사람들로 하여금 동해를 어두운 바다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일본은 또다시 바다를 문명의 양식으로, 평화와 번영의 기초로 삼아 전략과 외교의 축으로 만들 구상을 해야 하는 시점에 놓였다. 미국과 중국의 양극화 현상은 언젠가 아시아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9.11 이후 심리적.전략적 동요를 강화하고 있는 미국의 '아메리칸 스탠더드'-미국 일국예외주의(一國例外主義)와, 경제대약진을 예고하며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유라시아 대국 중국의 '차이니즈 스탠더드'-중화사상(中華思想)의 협공을 받게 될 일본의 '국난'시대가 또다시 재현될지도 모른다.

이때 일본은 중국과는 다른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바다와 해양은 불가분의 요소가 될 것이다. 일본은 거대 중국에 맞서 바다 대국으로서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야 하며, 슬기롭게 '공생'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일본은 미국과의 기존의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미국과 함께 아시아.태평양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해야 한다.

기상이나 환경에는 국경이 없다. 그리고 문명에도 국경은 없다. 일본이 이웃 국가들과 주위 바다를 개척해 해양문명을 구축하고 아시아와 태평양을 하나로 융합시킴으로써 다문명을 교차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일본의 역사적 사명인 것이다.

후나바시 요이치 일본 아사히신문 대기자
정리=박소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