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를 속이는 약물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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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뇌는 약 1000억 개의 신경세포로 이뤄져 있다. 신경세포들은 실타래처럼 네트워크를 이루며 연결돼 있는데, 신경세포들 간의 신호전달은 ‘시냅스’라는 좁은 간격을 통해 옮겨 다니는 신경전달물질에 의해 이뤄진다. 이 같은 물질은 200여 종류를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뇌를 타깃으로 삼는 약들은 신경전달물질처럼 행동하거나, 신경전달물질의 작용을 방해하면서 뇌를 통제하는 방식이다.

 5월 말 국내에 출시된 화이자의 금연치료제 ‘챔픽스’는 니코틴처럼 행동하는 물질이다. 흡연자가 담배를 피우면 니코틴이 대뇌로 이동, 니코틴 수용체에 결합하면서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하게 된다. 도파민은 뇌의 쾌감 중추를 자극해 기쁨, 불안 완화 등의 현상을 짧은 시간 내 나타낸다. 흡연자가 금연을 하게 되면 도파민의 분비가 감소해 우울, 짜증, 불면증, 집중력 저하와 같은 금단 증상을 일으키게 된다. 챔픽스는 니코틴 수용체에 달라붙어 도파민을 분비하게끔 해 불안한 증세를 없애준다.

또 니코틴이 수용체에 결합하는 것을 방해해 환자가 다시 흡연할 때의 즐거움을 느낄 수 없도록 한다. 한국화이자 관계자는 “껌이나 패치 등과 같은 니코틴 대체제의 금연 성공률이 15∼20% 수준인 데 비해 챔픽스는 12주 복용에 성공률이 60%에 달한다”고 말했다. 니코틴을 원하고 있는 뇌에 니코틴과 유사한 물질을 집어넣어 뇌를 통제하는 방식이 가능해진 것이다.

 뇌·위에 동시에 작용해 포만감을 빨리 느끼게 하는 원리로 비만을 치료하는 약도 있다. 애보트의 리덕틸은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중추신경을 자극해 식사량을 줄이도록 한다. 음식물을 섭취하면 뇌에서는 ‘세로토닌’과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돼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데, 리덕틸은 분비된 이들 물질이 신경세포로 재흡수되는 걸 막는다. 재흡수되는 과정이 막히면서 세로토닌과 노르아드레날린은 다음 신경세포로 더 많이 전달되고, 결과적으로 배부르다는 자극은 더 빨리 전달된다. 그 결과 포만감을 증대시켜 식사량을 떨어뜨린다. 교감신경에도 작용 한다.

체내 열 발산을 높여 에너지 소비를 증가시키는 이중작용을 통해 체중 감소를 돕는다. 리덕틸은 2001년 국내에 출시됐으며, 최근 한미약품이 보다 저렴한 개량신약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암환자가 항암 화학치료를 받을 때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부작용이 구토증세다. 미국 머크의 ‘에멘드’는 구역질과 구토에 연관이 있는 뇌 속 NK1 수용체를 억제해 암환자의 구토를 경감시키는 치료제다. 기존의 구토 감소제는 소화관에서 구토 신호를 차단한 데 반해 이 물질은 뇌로 전달되는 구토 신호를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메커니즘이다.

 뇌의 특정 부위에 작용해 잠을 깨우는 약도 있다. 중외제약의 ‘프로비질’이 그렇다. 낮에 과다하게 졸음이 몰려오는 ‘주간 과다 수면증’ 환자에게 처방된다. 수면을 조절하는 뇌 시상하부의 특정 부위에 선택적으로 작용해 졸음을 물리치게 한다. 그러나 밤시간 수면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기존의 각성제는 도파민을 분비시켜 야간 수면장애 등으로 나타나는 부작용이 문제였다. 또 프로비질은 시상하부에만 작용해 약물에 대한 의존 및 중독성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이점도 있다.

 이들과 같은 신약개발 과정에서 뇌를 타깃으로 삼기 위해서는 후보물질이 혈액뇌장벽(BBB·Blood Brain Barrier)을 통과해야 한다. BBB는 뇌혈관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구조물로, 산소와 영양분을 제외한 대부분의 외부물질이 뇌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준다.

김경진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도파민은 통과시키지 않고, 도파민 생성의 전단계 물질인 도파는 투과시킬 정도로 BBB는 매우 선택적”이라며 “뇌를 통제하는 약을 개발하려면 BBB 통과 여부를 따져보는 게 우선”이라고 설명했다.

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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