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 삶과 자연을 관조하는 마음 소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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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아직도 계곡 깊은 곳에는 지난 겨울의 눈이 곳곳에 남아 있어 봄은 지지하게 다가오지만, 사회변화의 속도는 화살과같다.「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가 아니라 온 세계가 변한다고 해야 될 지경이다.
우리의 눈길을 변하는 것에만 집중시키면 항상 더 빠른 것을 추구하는 속도주의에 집착하게 된다. 빠른 변화가 파생시키는 삶의 가속화는 우리들의 주변을 밤하늘의 불꽃처럼 화려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그것이 명멸하는 순간 우리들을 또한 허망하게 만들기도 한다.
더 빠른 것이 아니라 느리게 흘러가는 자잘한 삶의 세목들도 찬찬히 주목해 보면 그 나 름의 역동성으로 우리를 새롭게 한다. 이 달에 유심히 읽은 시는 추영수씨의「무엇이 우리를」(『동서문학』봄호)과 정현종씨의「이슬」(『문학과 사회』봄호), 그리고 박남준씨의「산숲을 내려가며」(『문예 중앙』봄호)등이 다.
추영수씨의 시는 우리들이 지나쳐 버리는「지금」이 갖는 삶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서성이게 하고 있는가를 귀 기울여 보고 눈여겨 본다. 슬픔과 번민이 있다 하더라도 이승의 태양아래 하얗게 비어 있는「지금」이란 화폭이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에 감사하며 무엇이 우리를 깨어있도록 하는가에 눈과 귀를 기울인다. 그의 일· 깨움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가 말하는「지금」의 귀함에는 순진무구한 시심이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확대됨을 볼 수 있다.
정현종씨의 시는 이슬 한방울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의 연쇄를 발견하고 있다.강물과 바람과 흙에서 그는 우리들의 피와 숨결과 살을, 그리고 구름과 나무와 새에서 철학과 시와 꿈을 발견한다. 그는 또한 곤충에서 외로움을, 지평선에서 그리움을, 꽃들에게서 기쁨을 인식한다. 이 모두는 불가분의 동일체다. 그의 시적변증법에서 나무는 구름을 낳고, 구름은 강물을 낳고, 강물은 새들을, 새들은 바람을 낳고, 바람은 나무를 낳는다. 이 순환적 연쇄는 그가 자연을 인식하는 독특한 방법이며, 이를 통해 그는 삶의 진실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거미줄에 매달린 이슬 한 방울에서 만유(만유)의 바람을 보고, 진공(진 공)에 서묘유(묘유)의 변전을 본다. 이들이 태양을 삼키듯 자연에서 피와 숨결과 살을 느끼는 그의 시는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발견하는 그의 독자적인 상상력의 소산이다.
신예시인 박남준씨의 시는 그와 동년배의 다른 시인들과 달리 자신의 내면에 집중된다. 그의 시적 언어 또한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다. 사랑의 막막함으로 더 나갈 길을 찾지 못할 때 그는 산숲으로 간다. 피어나는 꽃과 산새 한 마리에게도 치열한 삶이 있음을 관조한다. 산중의 삶이 세상사와 다름이 아님을 깨닫고 그는 산숲을 내려온다. 뜨겁게 달아오른 미친사랑의 노래를 산숲이 진정시켜준 것이다. 모두가 변하는 세상의 선두주자가 되고자 아귀다툼을 벌일 때 이처럼 자기자신과 거리를 갖는 시적 자세를 가다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변하는 것들의 세찬 소용돌이에서 무엇이 인간의 존재가 귀함을 깨닫도록 하는가를 돌이켜 보는 일이 새봄을 맞는 마음이 아닐까. 귀중한 것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다.
최동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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