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친­의회 “한발씩 양보” 무승부/타협 줄기잡은 러정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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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대결 계속되면 군부 등 개입위기 공감
의회와 대통령의 대립으로 파국을 향해 치닫던 러시아의 헌정위기가 극적 타협기미를 보이고 있다.
26일 개막된 러시아 인민대표대회는 대통령에 대한 의회의 탄핵결정과 이러한 의회의 결정을 무시하는 대통령선언이 이어질 것이란 당초의 우려와 달리 대통령·헌법재판소장·최고회의의장 3자가 모두 국가위기 타개를 위한 타협을 외치며 당초의 입장에서 한발씩 물러남으로써 극적 타협이 이뤄질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보리스 옐친대통령은 내달 25일 국민투표 실시를 계속 고집하면서도 발레리 조르킨 헌법재판소장이 중재안으로 제안한 대통령과 의회의 조기선거안에 동의를 표명했고,보수계가 요구한 경제정책 수정과 일부 각료 경질을 약속해 사실상 자신의 종래 입장을 대폭 수정했다.
옐친대통령이 조기 동시선거에 동의한 것은 전날 루슬란 하스불라토프 최고회의의장이 대통령에 대한 탄핵취소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또 오후 회의에서 알렉산드르 루츠코이부통령은 자신이 포함되는 대통령 신임투표에 찬성한다고 발표해 옐친대통령의 결정을 비난했던 지난 21일의 태도를 바꾸어 타협의 발판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내전위기로까지 치달았던 러시아 정국은 대통령과 부통령에 대한 신임을 묻는 여론조사 형식의 국민투표 실시와 대통령 및 의회에 대한 연내 동시선거라는 방식으로 타협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날 오전 10시 의회개막때까지도 타협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던 옐친대통령이 자신의 입장을 철회한 것은 자신의 최대목표인 국민투표 실시요구가 관철됐으며,여론의 정치에 대한 관심 고조 등에 성공해 현시점에서 타협에 응하는 것이 앞으로 자신의 정치행보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란 분석이다.
우선 옐친대통령은 이번 사태를 통해 정치와 개혁에 지쳐 러시아의 정국진행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국민을 끌어들여 의회에 외압을 가함으로써 반옐친진영으로 넘어간 시민동맹 등 중도계의 상당부분을 강경 보수파와 떼어 놓는 등 의회의 내분을 유도하는데 성공했다.
즉 옐친대통령은 자신에게 실망을 느껴 반대편에 선 이들에게 자신과의 타협이 훨씬 더 국가의 장래에 유익함을 인식시키는 데 성공한 셈이다.
반면 옐친은 현시점에서 보수파 및 의회와 정면대결을 지속할 경우 최근 조직정비를 완료하고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공산계 등 「거리의 세력」들에 혼란을 고조시킬 명분을 주게되고 이럴 경우 자신에게도 반드시 유리한 게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는 분석이다.
또 그는 자신의 행동을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한 헌법재판소의 판결과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한 민심이반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의회와의 대립에서 눈치를 보고있는 군부의 지지를 확신할 수 없고,측근중 측근으로 여겼던 유리 스코코프 안전보장회의 서기,발렌틴 스테판코프 검찰총장 등이 반기를 들고 자치공화국·자치주 등의 지방지도자들이 러시아연방 이탈움직임을 보임에 따라 의회와 정면대결하는 것보다 일단 『얻은 것은 굳히고 남은 것은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보수파가 주도하는 의회측은 옐친진영이 지금까지 반대해온 의회 및 대통령에 대한 조기선거 실시를 얻어낸 것이 최대성과라고 할 수 있다.
또 옐친의 대국민호소가 위헌임을 인식시켰고 그를 반대하는 세력과 여론도 조직화돼 있음을 보여준 것도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이번 사태를 점검해볼 때 어느 한쪽의 승리가 아닌 서로를 만족시킬 전리품을 하나씩 획득한 무승부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또 이 과정에서 현상태를 악화시킬 경우 군부 등 제3세력에 어부지리를 안겨줄 수도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앞으로의 러시아정국은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어정쩡한 상태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모스크바=김석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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