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300km 고속철 시대] 3. 전국이 한나절 레저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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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철도는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도 '고속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시간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던 곳까지도 당일 다녀올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 범위가 확대되면 관광.레포츠.문화산업이 활성화된다. 하지만 경쟁력이 없는 지역은 고속철 개통 이후 오히려 사람을 다른 곳에 빼앗길 우려도 있다. 지자체의 노력에 따라 격차가 더 벌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편집자]

#당일치기 온천욕=2004년 5월. 서울 동부이촌동에 사는 朴모(36)씨는 주말 나들이 때 승용차 대신 가족과 함께 집에서 10분거리인 용산역을 찾았다. 고속철도를 타면 웬만한 지역의 경우 당일 관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朴씨는 특히 용산역에서 30분이면 도착하는 아산역 주변의 온양.도고.아산온천을 즐겨 찾는다. 고속철도 요금(편도 1만1천4백원)이 부담이 되긴 하지만 휴일 귀가길에만 3시간을 허비하는 것에 비해서는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

*** 관광.문화 지도까지 바꿔

#서울에서 오페라를=2004년 7월. 대덕연구단지에 근무하는 申모(35)씨는 결혼기념일을 맞아 아내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재개관 기념 오페라 '리골레토'를 관람했다. 대전역에서 고속철도를 타면 서울역까지 불과 49분밖에 안 걸리기 때문에 과거엔 엄두도 못 냈던 문화생활이 가능해진 것이다. 음대 출신의 아내는 고속철도가 생긴 뒤부터는 지방생활의 문화적 소외감이 줄어들었다고 했다.

고속철도 개통은 라이프 스타일을 크게 바꿀 전망이다. 이에 따라 여가생활과 직결되는 관광.문화산업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지자체들은 고속철도역을 중심으로 인접 관광지를 연계하는 상품을 구상 중이다.

아산시는 고속철도 역사에서 주변 온천관광지를 연결하는 셔틀버스를 운행하는 등 늘어나는 관광객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또 올해부터 정부 예산 4백억원을 지원받아 현충사 인근 곡교천을 수변관광지로 조성할 계획이다. 대구시는 팔공산 동화사의 사찰체험 프로그램인 템플스테이와 3백50여년의 역사를 지닌 대구약령시의 한방 체험상품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부산시도 1월 해운대 해맞이, 8월 해변 록페스티벌, 10월 부산국제영화제 및 자갈치 축제 등 달마다 테마관광 상품을 개발, 홍보에 나섰다.

이들의 기대처럼 고속철도는 지방의 관광.문화산업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장밋빛 전망은 금물이다. 지방의 준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으면 오히려 수도권 집중만 더 심화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관광자원과 문화인프라가 취약할 경우 오히려 경쟁력 있는 수도권이나 주변도시로 사람을 빼앗길 수 있다.

대전발전연구원 문경원 연구원은 "고속철도가 개통되면 관광자원이 빈약한 도시의 경우 관광객이 더 줄어들 수 있기 때문에 관광자원 개발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공연.전시회.학술행사 등의 경우 서울 집중이 심해질 가능성이 크다. 서울의 공연장은 모두 1백47곳. 대전(18).대구(21)와는 비교가 안된다. 국제적인 문화.학술행사도 70%가 서울에서 열린다.

"서울의 공연을 보고 싶은데 지방이라 못 올라가겠다며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대중적인 뮤지컬 등을 고속철도와 연결시켜 패키지로 팔면 가능성이 있을 겁니다. "(LG아트센터 최정휘 홍보매니저)

*** 공연 등 도시 집중 우려도

벌써 지방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공연기획을 검토 중인 곳도 있다. 서태지 컴퍼니의 이주연 홍보마케팅팀장은 "고속철도가 지나는 지역의 큰 도시마다 각각 약 5~10% 정도의 회원이 거주한다"며 "고속철도를 타면 서태지씨 지방팬들이 서울에서 공연을 보고 당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에서도 신칸센 개통 이후 전반적으론 '도쿄 집중'이 더 심해졌다. 손님을 끌 수 있는 분야를 집중 육성해 특화시킨 곳만이 신칸센의 혜택을 보고 있다. 일본 도호쿠(東北)신칸센이 지나는 나카신타초(中新田町)가 바로 그 경우다. 인구가 1만4천명밖에 안되는 소도시지만 콘서트홀을 건립, 문화중심지로 변신했다. 콘서트홀은 개관 21년이 지난 현재 이용률이 96%에 이를 정도로 '대박'이 터졌다. 이곳은 음악회 스케줄도 신칸센 발착시간에 맞춰 도쿄에서 당일 왕복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인구 7만5천명의 사도(佐渡)섬도 신칸센과 페리.관광버스를 연계해 재미를 봤다. 이 섬은 겨울에는 눈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아 관광기간이 4~10월로 한정됐던 곳이다. 하지만 1989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지자체와 신칸센, 페리, 관광버스 운영업체가 협력해 저렴한 가격의 1박2일짜리 여행상품을 내놓은 것이다. 이때부터 수도권 주민이 몰려 관광객이 20% 이상 늘었다.

결국 지방의'성(盛)'과 '쇠(衰)'는 고속철도가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에 달렸다는 얘기다.

◇특별취재팀=강찬수.정철근.장정훈.권근영(정책기획부), 안장원(조인스랜드), 오종택(사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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