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한 사람 위해 만인의 눈길 외면하는 총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한덕수 국무총리는 그제 “대선 후보자의 공약에 대해 국책연구소 등이 타당성과 실현 가능성을 미리 검증해 보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대선 후보자의 공약은 대부분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고 대규모 예산이 소요되는 경우가 많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에 앞서 지난달 19일 국무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누구의 정책이든 판단해서 국민에게 판단 자료를 제공하는 것은 의무”라며 “정부 산하의 수많은 연구기관은 이런 것을 하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대통령의 명령’이라고 했던 이 지시는 한나라당 이명박·박근혜 후보를 겨냥한 것이었다.

우리는 노 대통령이 공무원의 선거 개입을 부추겼으며 공무원은 이를 따라선 안 된다고 지적했었다. 정부나 산하기관의 야당 후보 공약 검증은 본질적으로 공정할 수가 없다. 공무원은 정권의 입맛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객관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분석 보고서가 공개되면 야당 후보는 상처를 받는다. 예산도 낭비된다. 무엇보다 이런 행위는 공무원의 의식을 정파성으로 오염시킨다. 그러니 해선 안 된다.

그런데 대통령 지시 20여 일 만에 총리가 다시 강조했다. 대통령의 불법적 총론을 각론으로 뒷받침한 것이다. 그것도 ‘공직기강 관계장관 회의’에서였다. 공무원의 기강을 잡고 엄정한 선거 중립을 상기(想起)해야 할 자리에서 총리가 공무원들에게 기강 파괴를 주문한 것이다.

역대 정권은 임기 말 중립적 인사를 총리로 임명함으로써 선거 중립을 표방했다. 노태우 정권의 현승종, 김영삼 정권의 고건, 김대중 정권의 김석수 총리가 그들이다. 적어도 이때는 이렇다 할 총리발(發) 선거 개입 논란은 없었다. 총리는 행정부의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다. 대통령 한 사람의 눈치를 보기 위해 만인의 눈길을 외면할 것인가. 대통령의 지시가 부당하면 자리를 박차야 한다. 이회창 총리는 남북관계를 다루는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에서 총리가 제외되자 김영삼 대통령과 충돌했으며 결국 옷을 벗었다. 총리가 대통령의 하수인이 되니 총리 무용론이 나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