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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자정무­“자살” 권두영씨 오누이 스토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개혁 뜻 같았지만 방법은 달라/11남매중 장남과 다섯째… 유난히 가까워/권씨는 간첩사건 연루 투옥… 감방서 자살/오빠 목숨끊은지 한달보름만에 입각
신임 권영자정무2장관(56)은 「민중당 간첩사건」으로 구속됐다 자살한 고 권두영 전 고려대교수의 친동생이다. 장관과 간첩사건 피의자라는 양극의 위치에서 생사를 달리했지만 오누이는 다정했다.
이들은 명주의 고향 경북 예천에서 양조장을 하던 권동하씨(작고)의 11남매중 맏이와 다섯째로 태어났다. 아홉살의 나이차가 있었지만 큰오빠 권 교수는 10명의 동생중 권 장관을 제일 예뻐했고 장성해서도 가장 말이 잘 통했다고 한다.
오빠는 고려대 경제학과로 진학,6·25동란중 통역관으로 근무했다. 실력을 인정받아 경무대 외신담당비서관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그러나 고지식한 그는 학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의 전공은 경제학중에서도 가장 현실 변혁적 성격이 강한 노동문제. 66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를 창설했고 노동자·농민운동가 양성을 위한 「노동교육과정」을 개설하기도 했다. 이 과정을 마친 제자들이 70년대 노동운동·농민운동의 주역이 됐다.
동생 권 장관은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59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글로 현실을 비판하던 그는 유신의 서슬이 퍼렇던 75년 「언론자유」를 주장하다 해직당한다.
당시 오빠는 동생에게 『그런 일은 네가 할 일이 못된다』며 말렸다. 하지만 동생은 「동아언론 자유수호 투쟁위원회」위원장까지 맡아 투사의 길에 나섰다. 그러나 결국 두터운 현실의 벽앞에 평범한 주부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두사람의 운명을 엇갈리게 한 것은 80년대부터다.
오빠는 80년 정치해빙기를 맞아 「사회민주주의」 이상을 현실에 펼치기 위해 「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대표에 나섰다. 이때는 거꾸로 동생이 『그런 일은 목숨 내놓고 하는 일인데 그만두라』고 말렸다. 그러나 오빠는 고정훈씨의 민사당에 합류,81년 서울 성북구에서 출마했다 낙선했다. 실의한 그는 다음해인 82년 미국이민을 신청했다.
89년 미국영주권을 얻어 선친이 운영했던 「한국광물주식회사」 경영에 힘을 기울였다. 이후 그는 북한을 두차례 방문한다.
박용일변호사에 따르면 「일부 기업이 독점하고 있는 북한의 금·아연을 수입하는 길을 트기 위해」였지만 자연히 북한 당국자와 남한의 혁신계 얘기를 나눴으며 「여비」삼아 2만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그동안 가정주부였던 동생은 83년 「여성문제해결」을 위해 정부투자기관인 「여성개발원」 창립멤버로 또다른 현실참여를 시작해 여성개발원장까지 맡았다.
오빠는 지난해 9월 「민중당 간첩사건」으로 구속됐다 1월 서울구치소에서 목매 자살했다.
동생은 오빠의 시신앞에서 말없이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달 보름만에 「개혁」을 다짐하는 새정부의 여성장관이 됐다. 현실을 바꾸려는 오누이의 뜻은 같았지만 그 방법은 달랐던 것이다.<오병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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