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모험 속 슬픈 여운 '피터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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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나이를 먹지않는 아이는 과연 행복할까. 안그래도 나이 한 살 더 먹는 게 서글픈 즈음에 이게 웬 생뚱맞은 질문이냐 싶겠지만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자. 극장에서는 언제나 ‘전체관람가’영화만을 봐야 하고, 이성교제 역시 손 한번 잡고마는 단계만 거듭하는 삶이라면 당신은 정말 행복할거냐고.

'뮤리엘의 웨딩'과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으로 유명해진 호주출신 감독 PJ 호건이 만든 새 영화'피터팬'은 이 영원한 소년의 모험담을 익히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관객들에게 뜻밖의 정서적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후크'(1991년작)가 신나는 모험과 동심 예찬을 버무린 가족오락물이었던 반면 '피터팬'은 특수효과로 만들어낸 화려한 볼거리 뒤편에 어른이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이 지닌 양면적인 슬픔을 애잔하게 남겨준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물론 두려운 일이다. 매일 밤 두 남동생 존과 마이클에게 해적의 모험담.신데렐라 이야기 따위를 신나게 들려주던 소녀 웬디는 어느날 어른들에게서 더는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그래서 동생들과 다른 방을 쓰고 숙녀가 되는 준비도 해야 한다는 통고를 받는다. 그 날 밤 피터팬이 찾아와 세 남매를 환상의 세계'네버랜드'로 초대하는 게 우연만은 아닌 듯 보인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몸만 자라는 일이 아니다. 호건의 '피터팬'이 독특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웬디와 피터의 관계다. 요정 팅커벨이 웬디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걸로 봐서 둘 사이에 호감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이 영화의 웬디는 발칙하게도 '네 감정은 뭐냐'라고 피터팬에게 직설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천둥벌거숭이 소년일 뿐인 피터팬에게 '사랑'이란 생전 처음 듣는 단어다. 웬디는 철부지 남자와 연애하는 여자처럼 소통불능의 벽에 부닥치고,'어른'남자인 후크 선장에게 잠시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감독은 어린이용 동화로만 여겨지던 원작의 이런 어른다운 맛을 다시 살려내면서 거꾸로 연기는 어린 배우들에게 맡겼다. 각각 14세, 15세인 레이첼 허드우드(웬디)와 제레미 섬터(피터)는 어른과 어린이의 경계에 서있는 동심을 자연스레 보여주는 데 적격으로 보인다.

피터팬 이야기는 꼭 1백년 전인 1904년의 연극무대에서 탄생했다. 작가 JM 배리는 그 2년 전 발표한 '작고 하얀 새'라는 동화에서 인기를 끌었던 피터팬에 관한 대목을 모아 이 연극의 대본을 썼고, 1911년에는 '피터와 웬디'라는 소설로도 펴냈다. 이후 1백년간 연극무대에서 지켜진 전통에 따라 이번 영화에서도 후크 선장과 웬디의 아버지 역은 같은 배우인 제이슨 아이작스가 1인2역을 했다.

피터팬 이야기에서 으레 기대하는, 하늘을 붕붕 나는 환상적인 모험과 악당을 물리치는 통쾌한 대결은 이 영화에서도 제몫을 한다. 다만 모든 대결이 끝나고 웬디네 남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른 관객들은 해피엔딩에 안도하기보다는 성장을 거부하고 홀로 날아가는 소년의 뒷모습이 외롭게 느껴질 것이다. 전체관람가. 16일 개봉 예정.

이후남 기자

*** 새로워진 '피터팬'

피터가 말을 하고…웬디 비중 커지고

올해로 탄생 1백년이 된 피터팬의 이야기는 1924년 무성영화로 처음 영화화됐고, 53년에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됐다. 미국에서는 50~70년대에 네 차례나 TV시리즈로도 제작돼 방송됐다.

피터팬의 목소리가 나오는 실사 영화가 만들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PJ 호건 감독의 '피터팬'은 원작과 비슷한 또래의 소년이 피터팬 역할을 맡았다는 점에서도 이전 작품과 다르다. 흥미롭게도 무성영화와 TV시리즈에서 피터팬은 젊은 여배우의 몫이었다. 국내에서도 30대 이상 관객이라면 윤복희가 피터팬으로 나왔던 뮤지컬을 기억할 터이고, 미국에서 76년 만들어진 TV시리즈에서는 배우이자 우디 앨런의 전 부인으로도 유명한 미아 패로가 피터팬을 연기했다.

91년작 '후크'에서 남자인 로빈 윌리엄스가 피터팬을 맡긴 했다. 하지만 이 피터팬은 자신이 누구였는지 까맣게 잊고 40대 변호사가 돼 있는 중년의 아저씨다. 물론 이 설정은 JM 배리의 원작과 관련없이 새로 창작된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웬디와 피터팬 사이의 미묘한 풋사랑이 스크린에 본격적으로 그려질 기회가 이전에는 거의 없었던 셈이다. '후크'의 웬디는 조연 중 하나일 따름이었고 주목할 만한 배역은 줄리아 로버츠가 연기한 팅커벨이었다. 이번 '피터팬'에서는 프랑스 여배우 뤼드빈 사니에가 목소리 없이 몸짓만으로 요정 팅커벨의 희극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지만 웬디의 연적(戀敵)이 될 만한 비중은 아니다.

"이전까지는 영화로 옮겨지지 못했던 원작의 놀라운 점을 최대한 담으려 했다"는 호건 감독은 '피터팬'이 피터뿐 아니라 웬디의 이야기라는 점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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