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뉴미디어 상업화 부추기는 KBS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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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대통령 선거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2002년 12월 초, 후보자 합동 TV토론이 예정되었던 바로 앞에 MBC가 느닷없이 무슨 '영화제'라는 것을 방송한 적이 있다. 당시에 특정 방송사가 왜 이 시점에 갑자기 영화제를 개최하는 것인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감독상.제작상.연기상 등을 휩쓴 사람들의 면면을 보고 정치적인 속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을 갖는 정도였다.

하지만 며칠 후 "고급 영화 채널" 운운하며 영화전문 채널인 MBC무비스를 출범시킨다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 깊은 뜻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영원한 경쟁 입장인 KBS와 SBS도 영화 오락 채널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 후, MBC무비스가 값싼 3류 TV용 외화와 철 지난 국산영화로 편성된 다른 영화채널들과 얼마나 다른지는 새삼 말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지상파 방송 독과점과 뉴미디어 시장 무차별 진출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고, 공영성을 강조한 정연주 사장이 취임하면서 분위기가 다소 수그러진 듯했다. 그런데 최근 KBS가 다시 신규 오락채널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도 "지상파 PP가 앞장서서 프로그램 수신료 등 황폐화한 케이블TV 시장을 정상화하겠다"는 주장을 내걸고.

공영 방송인 KBS의 오락 등 채널 사업 진출에 대해서는 여러 각도에서 많은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상업성으로부터 독립돼야 하는 공영 방송이 철저하게 상업적인 뉴미디어시장에 진입한다는 것 자체가 공영 방송의 공영성은 물론이고 상업방송의 시장 질서마저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지금의 케이블TV는 중계 유선방송의 무차별 전환정책으로 지상파 재송신, 홈쇼핑 채널, 지상파 방송 계열 PP 위주로 편성된 또 다른 중계 유선방송으로 전락한 상태다. 한마디로 지상파 방송에 빌붙어 독과점 구조를 강화해 주는 보조 매체화한 것이다. 여기에 공영 방송인 KBS마저 오락채널에 진입할 경우 이같이 왜곡된 구조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여기서 지상파 방송사들이 뉴미디어 사업 진출의 근거로 내걸고 있는 공영 방송 위기론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다. 물론 최근 몇 년간 지상파 방송의 시청 점유율은 꾸준히 하향 곡선을 긋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전체 방송시장 영리 매출액의 60%, 광고 매출액의 85% 이상을 점유하고 있고, 더욱이 지상파 방송 계열 PP들이 스카이라이프 41%, 케이블TV 31%의 시청 가구를 점유하고 있다.

이는 지상파 방송 시장점유율 하락을 근거로 한 소위 공영 방송 위기론이 허구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지상파 방송의 시청자들이 계열 PP로 이전한 것일 뿐이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지상파방송 3사의 호황구조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KBS의 오락 채널 진입이 정연주 사장 출범 이후 내세워온 '공영성 강화'라는 구호를 무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특히 지상파 채널의 공영성 강화를 위해 다른 데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나 이율배반적이다.

왜냐하면 공영 방송의 오락채널 진입은 그나마 생존에 허덕이고 있는 다른 공공.정보 채널들마저 시장에서 구축(驅逐)해 버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설사 공영 방송 위기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결국 KBS는 지상파 방송의 공공성을 위해 뉴미디어 방송시장 상업화를 부추기는 모순된 행위를 하는 셈이다.

무엇보다 방송 정책권자인 방송위원회가 KBS를 비롯한 지상파 공영 방송사들의 뉴미디어 시장 진입을 법조문을 핑계로 강건너 불구경 하듯 해서는 안된다. 이번 KBS의 오락채널 시장 진입에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것은 방송위원회의 정책 의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가능성이 크다.

황 근 선문대 교수.신문방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