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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끝)「세계 원주민의 해」특별기획 시리즈| 샷포로에도 참혹의 현장|조선인 피로 건설된「모이와 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동계올림픽으로 알려진 인구 1백70만 명의 일본 제5의 현대도시 삿포로. 이곳에도 조선인강제연행자가 남긴 수난의 자취는 곳곳에 남아 있다. 매년 2월 눈 축제 때면 일본 전국에서 관광객이 몰려드는 시민스키장 바로 인근의 북해도 전력 모이와 발전소 댐과 정수 장이 바로 그곳. 삿포로 전역에 전기·물을 공급하는 이곳이「이름 없이 숨져 간 문어 방(감옥노동) 징용 자」들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사실이 최근 폭로돼 이곳 시민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홋카이도 및 삿포로에 거주하는 지식인 1백 명으로 구성된 역사연구시민단체「삿포로향토를 찾는 모임」(대표 이시다 구니오)이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이곳 댐 공사로 모두 1백여 명의 사망자가 났으며 ▲이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인 강제 연행 자로 신원이 확인되었고 ▲린치 끝에 생매장된 희생자도 다수 있다는 것이다.
발전소 공사가 시작된 것은1934년. 발주처는 북해도 수력전기회사(현 북해도 전력). 가시마조(현 가시마 건설)등 2개 건설회사가 원 청으로 하청함바(반장·현장숙소)에 모두 3천명의 노동자가 소속돼 36년까지 3년간에 걸쳐 완공한 대공사였다.
증인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공사장에서 일한 대부분의 노동자가 당시 식민지였던 한반도에서 강제로 끌려온 징용 자 들이거나 당시 대공황으로 빈곤상태에 있던 떠돌이 일본노동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상당수가 감금상태에서 도망칠 수 없는 문어 방 노동자로 산을 뚫는 난공사에 투입돼 견딜 수 없어 도망쳤다가 다시 붙잡혀 구타 끝에 살해당하거나 산채로 매장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어 고대에 있었다는 노예노동을 연상케 한다.
「향토를 찾는 모임」이 40여 생존자들의 증언과 사망기록을 종합해 현재까지 밝힌 조선인 희생자는
▲박금주(당시 28세·35년 8월 사망)
▲야마모토 하루기치(창씨 명·35년 6월)
▲김승호(48·35년 1월)
▲김상수(39·35년 2월)
▲백학기(37·35년 2월)
▲미상 2명(35년 3월)등 7명이다.
당시 측량기사조수로 공사현장에서 함께 생활한 증언자 우에다(74)씨는 비극적인 현장목격담을 전하면서『댐 공사장 부근은 시체 투 성이었다. 노무감독들은 지쳐 쓰러진 노동자들에게 오줌을 먹이는 형벌까지 가했고 뜨거운 물을 퍼붓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사망자가운데 현재까지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35명으로 우에다씨는 이들이 곤봉으로 구타당해 죽거나 산채로 버려진 후 콘크리트 속에 파묻혀 그대로 사람기둥(인왕)이 된 곳이 5개나 된다고 현장을 찾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안내하기도 한다.
82년 발족이래 삿포로시 주변의 광산이나 토목공사장·군사시설 등 강제연행 실태를 줄곧 발굴해 온「향토를 찾는 모임」이 추산하는 삿포로지역 조선인 징용 자는 11곳 약 1만 명에 이른다.
대표적인 조선인노동자 사역 장은 모이와 댐 외에 ▲삿포로비행장 ▲치도세 선 열차선로 ▲데이 산게이 선로 ▲호헤이가와 모래 채취 장 ▲군용물자저장고 등 이 가장 피해가 컸던 비극의 현장으로 꼽힌다.
다음은 강제연행 됐다 해방 후 그대로 남아 삿포로에 살고 있는 재일 한국인들의 증언.
『갑자기 트럭에 실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른 채 이곳으로 끌려왔다. 함 바에서는 늘 콩깻묵 같은 형편없는 식사에 중노동으로 시달려 결국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김달선·73)
『지쳐 쓰러진 사람은 그대로 생매장되었고 도움을 구하는 손을 그대로 삽으로 묻어 버렸다.』(이상록·73)
지난 11월28일 열린 삿포로시민예술제에는 모이와 댐 공사장 인부의 비극적 이야기가 그대로 연극으로 재연돼 삿포로가 데루홀을 가득 메운 1천4백 명 관객을 감동시켰다. 소문으로만 듣던 감옥노동의 실상이 한 조선인징용자의 가족 사를 통해 알려지고 과거 일본이 태평양전쟁과 조선식민으로 한국 민에게 어떤 죄악을 저질렀는지를 한 일본중학생의 눈으로 고발하는 내용이 매우 감동적으로 그려졌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삿포로시민 3백 명으로 추진된 연극의 공연과정이 전례 없던 일이었다. 출연진은 대부분 배우경험이 없는 교사 또는 학생들이었고 여기에 주부합창단·농아연극단체가 자발적으로 참여한데다 진행 중 배경으로 쓰인 아리랑·도라지 등 춤과 노래는 재일 한국민단소속 우리문화연구회회원과 조총련무용단이 맡았다. 기획은 아이누우타리 협회가 적극 참여, 청중동원에 가세했다는 주최측의 얘기다.
과거의 가해자를 대표해 삿포로시민단체가 앞장섰고 피해자인 한반도의 남-북 교민과·아이누가 손을 잡고 이뤄 낸「대화합의 장면」이었다.
이날 주최측 대표인 스즈키치데이치(홋카이도 대 명예교수)씨는 공연소감에서『과거에 눈을 감는 자는 결국 현재에도 맹목이 된다』는 서독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의 말을 인용,『강제 징용돼 이름 없이 사라진 조선인의 고통과 슬픔을 잊지 말고 그들을 진혼하는데 의미가 컸다』고 자 평했다.
그러나 이날 참여한 재일 한국인들은 한결같이 가슴 한구석에 허전한 느낌을 갖게 됐다는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날 공연으로 일본국민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 감과 역사에 대한 무관심이 일시에 사라지리라고 볼 수 없다는 생각도크다.
이 연극에 참여한 역사학자 마쓰모토 시게요시(북해도 교육대 강사)씨는 이를 계기로 모이와 징용희생자의 혼을 위로하는 현창비(위령 비)건립운동을 더욱 적극화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한편 일본인스스로 아이누와 조선에 대한식민지배에 사죄하고 책임과 배상필요성을 자각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일본인이 과연 얼마만큼 역사를 정확히 알고 있으며 지도층의 대한국역사관이 과거에 비해 얼마나 달라지고 있는지 삿포로시민 일부를 통해 이해하기는 힘들다는 게 마쓰모토씨의 지적이다.
강제징용조선인의 전후보상문제에 대해 일본정부는 65년 한일조약으로 배상문제는「해결 끝」 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최근 여론화되고 있는 여성정신대문제만 해도 강제 연행한 것은 아니라고 계속강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인가운데 조선 식민지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도 상당수 있다. 지난 91년 1월8일 아사히신문의 의식조사에 따르면 일본인 5명중1명이 일본의 조선식민사실을 모른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홋카이도 교육대학의 경우 교사지망생인 이 학교 학생들 가운데 12·3%가 조선·대만의 식민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한 앙케트에서 밝혀진 것으로 마쓰모토씨는 전했다.
양심적인 홋카이도역사연구자들은 일본지식인·관료가운데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우익인사들이 늘어나고 있고 이들이 정부의 군사대국화·정치대국화 현상을 뒤에서 부추기고 있다고 우려한다. 이들은 지난 91년12월15일 홋카이도방송(HBC)이 방송한 한 TV대담에 나온 와타나베 쇼이치(상지대)교수의 발언을 역사왜곡의 대표적 예라고 지적, 같은 일본인으로서 부끄럽다고 털어놨다.
다음은 산케이신문 제1회 정론상수상자로 알려진 그의 발언 중 파문을 불러일으킨 대목.『조선병합조약은 일본과 조선정부가 서로 좋다고 합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일본정부는 엄청난 돈을 내가면서 조선인을 일본인과 동등하게 취급하려 한 것이다. 조선병합조약에 대해 구미열강은 반대하지 않았다. 창씨개명만 해도 조선인의 성을 일본인과 같이 만들었지만 이는 조선인 스스로 원해 한 것이지, 강제한 것이 아니다. 조선인 군대지원은 1943년에만 56· 7대1의 치열한 경쟁률을 보였으며 당시에는 동경대 나 대장성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웠다. 징병시켜 달라는 지원자로 줄을 이었다.』
마쓰모토씨는 교육현장에서도 이 같은 역사왜곡을 발견할 수 있다면서 아이누와 재일 한국인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자신과 관계없는 일」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교사와 학생이 있는 한 강제 징용 자 보상이나 정신대규명 등 일본의 전후처리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삿포로=방인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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