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 떠난 비, 불안한 ‘홀로 서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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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03면

2004년 프로듀서로 막 미국 진출에 성공한 박진영씨를 만났을 때 일이다. 그는 대뜸 “우리는 모두 야구선수 박찬호에게 고맙다고 절해도 모자라요”라고 말했다. 이유를 물었다. “미국 여자들은 아시아계 남자들을 섹시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공부는 잘하지만 신체 능력이 엉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채노박’이 메이저리그의 A급 투수가 되면서 얘기가 달라졌죠.” 그는 한마디 덧붙였다. “비가 영어만 되면 당장이라도 금발 미녀들이 아시아인에게 환호하는 걸 볼 수 있을 텐데.”

LA 공연 막판에 취소된 가수 비

비의 영어 실력은 지금도 ‘열심히 노력 중’ 상태이지만 이 말은 거의 사실이 되는 듯했다. 2006년 이후 비는 최고 권위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뽑은 ‘가장 영향력 있는 100대 인물’에 2년 연속 선정됐다. 이를 계기로 인기 코미디언 스티븐 콜베르가 코미디의 소재로 사용하고, 뉴욕 타임스가 그의 메트로폴리탄 공연의 리뷰를 썼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렇게 욱일승천하던 비가 최근 살짝 갈지자 행보로 우려를 낳고 있다. 하와이 공연의 취소야 정말 돌발 사태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바로 뒤이어 1일(한국시간) LA 공연이 시작 1시간30분을 남기고 취소된 것은 뒷맛이 좀 나쁘다.
관객 2만 석을 목표로 했던 규모의 공연이 하루 전도 아니고 1시간30분 전에 취소됐다는 것은 공연 주관사의 업무 추진 능력에 심각한 의문을 던지게 한다. 주관사 ‘스타엠’ 측의 설명대로 현지 공연 업체의 불성실한 준비가 공연 취소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하더라도 무대가 설치돼 있지 않을 정도로 부실한 준비 상황을 주관사가 공연 당일에야 알았다는 것은 직무유기라 따져도 할 말이 없다.

이 대목에서 미국 LA 타임스는 3일(현지시간) “비가 다시 미국에서 공연하기까지는 약 2년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흠집을 냈다. 물론 비가 영화 ‘스피드 레이서’의 촬영에 들어가 당분간 가수 활동을 하기 힘들 것이라는 점도 고려한 얘기였지만 상식적으로 봐도 이 정도의 심각한 사고를 내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미국 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힘들다.

비는 5월 11일자로 그를 키워낸 ‘JYP 엔터테인먼트’와 결별하고 여타 기획사들의 거액 베팅을 마다한 채 홀로 서기에 나섰다. 아직 공식 발표는 나지 않았지만 비는 이제 스스로 프로듀서 겸 아티스트, 그리고 그 자신의 매니지먼트까지 맡아야 할 전망이다. 하지만 과연 그가 매니저로도 자신 정도의 거물을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지는 인정하기 쉽지 않다. 공교롭게도 그와 결별한 박진영씨는 같은 시기에 미국 지사 격인 ‘JYP USA’를 설립, 아시아계 청소년들을 미래의 팝 아이돌(Pop Idol)로 키워 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했다. 그의 캐치프레이즈는 ‘비는 또 만들 수 있다’지만 아무리 노하우가 뛰어나다 해도 만드는 족족 비가 될 수는 없을 게 당연한 일. 헤어진 두 사람의 그림자가 둘 다 지나치게 길어 보여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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