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연행 명부 남아있을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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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눈이 한 자나 쌓인 추운 겨울에도 조선에서 온 강제징용자들은 다 해진 옷차림에 고무신을 신고있어 늘 안쓰럽게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유바리에서 생활, 강제징용조선인의 실태를 기억하고 있는 가토 히로시(가등 박사·56·북해도역사교육자협의 회장)씨의 조사에 따르면 조선인 강제징용은 1939년부터 본격화, 3단계로 실시되었다. 39년9월부터 42년까지가 1단계로 「자유모집」이라는 형태. 이는 기업체 스스로가 노동자를 모집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미쓰비시 유바리광업소가 조선총독부에 할당인원배정을 신청하면 할당된 지역에서 경찰의 협력을 얻어 사람을 모집했다. 그러나 할당된 인원에 맞추기 위해 사실상 강제연행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2단계는 42년2월부터 시작한 「관알선」. 조선총독부와 표리일체관계인 조선노무협회를 주체로 노동력을 확보한 방식으로 보다 직접적인 강제연행형태.
최종단계는 44년9월부터의 「징용령에 따른 징용」. 한장의 통지명령만으로 막무가내로 끌어간 노예사냥이었다.
가토씨는 강제연행자 명부 조사가 지지부진한데 대해 『일본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못할리가 없다』면서 당시 강제연행과정에는 홋카이도청·기업체·조선총독부·내무성·경찰·노무협회·후생성·노동성직업안정소·군청·탄광사무소 등이 조직적으로 개입했고 7∼8곳에 동일한 명부를 비치·보관해 문제가 발생할 것에 대비했기 때문에 전후 소각처리 했더라도 어느 한군데 기록이 남아있을 것은 확실하다는 얘기다.
유바리시 시미즈자와국민학교에서만 30년째 교편을 잡고있는 그는 조선인 강제연행의 흔적을 보고싶다는 기자의 요청에 91년 미쓰이 탄광이 폐광한 이후 유바리는 종래의 검은 석탄촌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바꿔가고 있다고 전했다. 금년으로 세번째 맞는 유바리국제영화제도 그렇고 마을 어귀에 서있는 「멜런과 색유리의 고향」이라는 간판도 이를 상징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사방에 해발 2천m가 넘는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지형이나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근로자기숙사들이 여기저기 흔적처럼 남아 「감옥노동의 잔혹 현장」을 짐작케 했다.
가스폭발사고 때마다 뚫었다는 6개의 갱구, 탄산이 내려다보이는 한구석에 쓸쓸히 서있는 조선인 광부 위령비, 역앞에 서있는 신사, 시가지에 아직도 남아있는 조선인 여자정신대 위안소 건물을 가리키면서 가토씨는 강제연행자 실태조사작업은 이제부터라는 의욕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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