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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비정규직을 볶아 대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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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해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비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사회적 보호가 필요하다. 참여정부에서는 ‘균등 대우’와 ‘남용 방지’를 원칙으로 비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사회적 보호를 강화해 나갈 것이다.”

 참여정부의 비전과 과제를 밝힌 책 『역동과 기회의 한국』(2004)에 나오는 말이다.

 현 정부가 출범 초부터 취약 계층 근로자 보호 강화의 일환으로 추진해 온 비정규직법이 1일부터 시행됐다.

 우리나라 비정규직 근로자는 전체 임금 근로자의 3분의 1에 달한다. 임금은 정규직의 63% 수준이고, 근로 조건도 상대적으로 나쁘다. 능력 개발의 기회가 크게 부족해 비정규직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뜨거운 가슴을 가진 참여정부가 이를 시정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는 것은 좋고 옳은 일로 보인다.

 그러나 현 정부에서 거듭 드러난 바와 같이 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일부에서 미리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비정규직법도 좋은 의도와 달리 노사분규와 비정규직의 고용 불안을 증가시키는 역효과를 낳을 것으로 전망된다.

 물론 수익성 개념이 없는 공공 부문과 잘나가는 일부 대기업에서는 비정규직 근로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모범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혜택을 받을 근로자는 길게 보고 많이 잡아도 500여만 비정규직 근로자의 20%대를 넘기기 힘들다. 나머지 중 절대다수는 기업이 생존과 국제경쟁력을 위해 인건비 절감을 포함한 온갖 꾀를 짜내야 하는 현실 속에서 더욱 고달파질 것이 뻔하다.

 정부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비정규직은 사회적으로 유용하다. 특히 기술혁신의 속도가 빠르고 경제의 서비스화와 지식기반경제가 진전되는 세계화 시대에 비정규직의 유용성이 갈수록 커진다. 기간제 근로를 2년 이상 연속해 쓸 수 없고, 기업이 원하는 만큼 파견근무의 융통성도 없는 비정규직법은 노동시장을 더 왜곡시킨다. 고용의 유연성을 살리면서 지나친 임금 격차를 시정토록 도덕적 설득을 해 나가는 것이 슬기로운 접근 방법이었다.

 앞으로 나타날 역효과를 예의 점검하여 (이에 대하여는 중앙일보 6월 29일자 시론 ‘비정규직법 부작용 줄이려면’ 참고) 다음 정부에서 비정규직법을 폐지하거나 대폭 개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비정규직은 삼국지에 나오는 ‘들볶이는 콩’을 연상시킨다. “콩깍지를 태워 콩을 볶누나/솥 속의 콩은 울고 있다/원래 한 뿌리에서 자라났는데/어찌 이리도 급하게 볶아대는가.” 조조의 큰아들 조비는 왕이 된 후 일찍이 자기와 세자 자리를 다툰 아우 조식을 죽이려 하였다. 그리하여 ‘형과 아우’라는 제목의 시를 즉석에서 쓰면 살려 주겠다고 시험했다. 그때 조식이 자신의 궁박한 처지를 빗대 읊은 시다. 우리나라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죽이려 하지 않는다. 형제애로 연대하려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정규직을 은근히 볶아 대고 있는 상황이다. 비정규직에 대한 이른바 불균등 대우와 남용은 기본적으로 정규직의 노동비용이 우리 경제력에 비해 너무 높은 데 기인한다. 그런데도 정규직은 자기네 임금이 높고 해고가 까다로워 기업이 비정규직을 쓰려 한다는 사실을 나 몰라라 한다. ‘내부자’를 대변하는 노조가 주거비와 사교육비, 고물가 때문에 임금을 많이 올려야 한다고 주장할 때 비정규직 근로자와 실업자의 억장이 무너진다. 특히 회사가 적자가 나도 임금 인상을 고집하는 대기업노조의 이기주의와 불법·정치파업은 경제를 멍들게 하여 비정규직에 멍에를 씌운다.

 최근 한국노총은 임금안정과 고용안정을 주고받는 상생의 노사 관계를 지향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에 맞는 바람직한 변신이다. 민주노총도 이제 미필적 고의로 비정규직을 볶아 대는 콩깍지 노릇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미국 미네소타대 경제학박사, 한국계량경제학회 회장, 중앙대 정경대학장(현)

안국신 중앙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