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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이 깨어지는 계절/최규장재미언론인·정치학박사(기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억지 약속 이행땐 되레 부작용/「신한국」 이끌 지도력 관심집중
야전병원의 노련한 군의관은 밀어닥치는 부상자를 우선 두갈래로 나눈다. 가망없는 환자와 회생할 수 있는 환자­. 절망적 중상이나 가벼운 부상자는 제쳐놓고 살릴 수 있는 환자에게 전력을 쏟는다. 인력과 약품이 부족한 전쟁터에서 부상자 모두를 돌보다가는 건질 수 있는 생명마저 잃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성했던 정치공약의 계절은 가고 이제 공약이 깨지는 계절이 왔다. 제한된 임기와 능력으로 백가지 개혁을 모두 수술대에 올려놓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변화와 개혁의 기수로 등장한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실천불가능한 공약은 아예 수술대에 올리지도 않으려는 뱃심이다.
백악관 진용의 25%를 줄이겠다던 「작은 정부 공약」은 이미 뒷걸음질쳤다. 로비이스트출신을 상무장관에 앉힘으로써 특수이익이 판치는 워싱턴 로비문화를 뜯어 고치겠다던 공약도 무색해졌다. 아이티난민에게 희망을 던지던 청신호는 하루아침에 적신호로 바뀌고 말았다.
임기중 적자를 반으로 줄이겠다던 공약도 중산층 세금경감 공약과 함께 물거품이 될 조짐이다.
공약을 깨는데는 언제나 구실이 따른다. 전임자가 남긴 적자규모가 두배나 커 대대적 공공투자 등 경기부양을 위한 처방이 후퇴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기대를 걸었던 군사비 삭감도 신무기 구입비의 과소평가와 탈냉전 평화배당금의 과대평가로 막상 칼자루를 쥐고 보니 더이상 깎아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고용주에게 1.5%의 임금을 재훈련에 사용토록 하겠다던 공약도 법제화문제로 벽에 부닥쳤다.
제조업 전문성을 중소기업에 확산시키기 위한 1백70개 「제조센터」 설립공약도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당초 계획이던 30개 정도로 물러섰다.
클린턴은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곧잘 비교된다. 12년만에 민주당이 백악관을 탈환했기 때문이다. 새 행정부의 요직도 거의 카터시대 인맥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클린턴은 선거공약을 너무 충실히 지키려다 좌초한 카터의 교훈을 잘 알고 있다. 「카터화」(Carterization)의 방지가 그것이다. 카터는 외동딸 에이미양을 워싱턴 공립학교로 옮겨 고지식하게 공약을 지켰다. 대조적으로 악화일로의 공립학교를 살린다던 약속은 헛공약이 아니냐는 여론도 아랑곳없이 새 대통령의 딸 첼시는 백인들만 다니는 사립학교로 보내졌다.
첫 내각의 약체성과 윤리성에 대한 논란이 거세지자 법무장관 지명자를 자진 철회함으로써 맞을 매는 빨리 맞겠다는 자세를 보였다. 지킬 수 없는 공약은 야전병원의 노련한 군의관처럼 일찌감치 수술대에서 내려놓고 있다.
후보때의 공약을 고집하는 우를 범하지 않겠다는 정치기법이다.
후보때 내건 인권정책을 밀고나가다 당시 냉전구조하의 국제질서에 서 카터행정부는 적보다 우방에 더 큰 곤욕을 안겨주었다. 후보때 내세운 주한미군 철수 공약도 일찍 철회했더라면 존 싱글러브소장의 항명으로 군 최고 통수권자의 체통에 먹칠하는 사태는 막았을 것이다.
에이브러햄 링컨도 유세때는 노예제도 철폐에 반대한다고 공약했다. 64년 선거에서 린든 존슨과 배리 골드워터후보는 각각 월남전과 종식이냐 강행이냐로 역사적 대립을 벌였었다. 그러나 존슨행정부가 들어서자 공약과는 정반대로 확전에의 길에 들어섰다. 레토릭(수사)과 정책은 엄연히 다르다. 후보가 집권후에도 후보처럼 행동할때 영원한 후보로 표류하기 쉽다. 후보는 수사의 세계에 머무를 수 있지만 대통령은 현실에 발을 딛고 책임을 져야 한다.
클린턴의 공약은 길었어도 그의 취임사는 짧디 짧았다. 짧은 취임사에서 「변화」란 말을 여덟번이나 구사했지만 공약에의 청사진을 펼치기보다 국민의 희생을 요구했다. 아무일도 하지 않고 뭔가를 기대하는 나쁜 버릇을 고치자고 호소했다. 공약실천은 국민과 함게 할 행진임을 일깨웠다.
현대 정치에서 공약은 후보의 상상력과 상징성을 지닐뿐이다. 성숙한 민주사회의 현명한 유권자는 정치인의 공약에 지나친 기대도 하지 않지만 공약의 깨어짐에 놀라지도 않는다. 공약은 깨질 수 있지만 지도자의 리더십과 결단력에 대한 신뢰감에 금이 간다면 국민은 허망하다. 강한 지도자의 파약은 정책의 연장으로 비춰질 수 있어도 허약한 리더십의 노출은 국민을 불안케 한다. 공약을 깨는 것은 후보의 껍질을 벗고 지도자가 탄생하는 아픔일때만 정당화될 것으로 보인다.
지도자는 약속을 깰 수 있어도 취소할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신한국건설에 거는 우리의 기대도 그 공약성보다 이를 이끌 지도력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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