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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자질과 능력(하)|대중연설 없는 "수수께끼" 인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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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김정일은 줄곧「제왕 학」을 교육받은 만큼 다방면의 지식을 쌓을 기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외부의 북한분석가들은 그의 자질과 능력에 의문을 제기해 왔다. 이에 대해 북한 내부는「친애하는 지도자」김정일의 이미지를 높이려고 집요한 노력을 펼쳐 왔다.
김정일의 자질·능력과 관련, 그가 북한 주민에게는 어떤 인물로 묘사되는 가도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우선 북한 주민들은 일상적으로 그의「예술적 자질」을 접하며 산다.
60년대 후반이래 제작된 대표적 영화나 혁명가극에 김정일의 입김이 상당치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는「종자론」이라는 문예창작의 기본이론을 제시한『영화예술론』을 비롯해, 문예방면의 저술을 잇따라 출판해 왔다. 북한의 문학예술인들은 누구나 그의 창작이론에 따라 창작활동을 한다.
그가 문예분야에 깊숙이 관여해 온 것은 북한에서 예술분야가 강력한 선전·선동수단인 탓이다.
김정일이 권력 전면에 부상하게 된 계기도 선전분야와 관련된다. 67년 5월 박금철·이효순 사건(갑산 파의 권력퇴장)이 터지자 노동당에서는 유일 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선전활동이 중요과제로 등장했다. 바로 이때부터 그가 영화를 비롯한 문예부문을 총괄 지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김정일은 북한 주민에게 아버지 금일성에 대한 충성과 빨치산 혁명전통을 강조하는 인물로 각인 돼 있다.
60년대 말이래 북한에서는 유일 사상체계와 당의 유일 적 지도체계가 확립됐다. 이 과정에서 그는 김일성에 대한「충실성」교양 강화에 앞장섰다. 주민들에게 자기 아버지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북한의 모든 인쇄물에 김일성 이름을 굵은 글씨로 찍게 하거나 주민 모두가 김일성 배지를 달도록 한 장본인이 그다. 물론 수렁에 대한 충성을 강요해 후계자인 자신에게도 충성케 하려는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북한의 선전물에 따르면 김정일은 매사에 빨치산전통을 강조하고 스스로 그 계승자임을 자처한다.『무슨 일을 하든 항일유격대식으로 해야 한다』며 당 간부들에게『항일유격대처럼 배낭 메고 아래로 내려가 사업하라』고 지시한다. 김정일은 빨치산의 덕목이던「혁명적 의리와 동지애」를 북한 최고의 도덕가치로 주장하고 있다.
그는 항일빨치산 원로들에게 특별대접을 해 왔다. 그가 권력전면에 부상한 뒤 이들에게 전속 간호원을 붙여 주고 평양의 봉화진료소(당 중앙의 핵심간부 전문진료소) 의사들을 주치의로 배정해 줬다. 필요물자(식품·영화필름·장수의학 책 등)는 우선적으로 공급한다. 이들의 진갑 잔칫상 마련이나 자식중매에 앞장서는 일도 빈번하다고 한다.
김일성 종합대학에 유학한 중국 북경대학의 최응구 교수는 김정일이 새해 첫날이면 염색약 등 선물을 챙겨 노 혁명가들에게 세배를 다닌다고 증언한다. 전 북한외교관 고영환씨는 군부 원로인 오진우(인민무력부장)가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맬 때 살려내려고 그가 백방으로 노력한 일화를 전한다.
김정일이 통치일선에 나선이래 그는 아버지보다「정열적」이라는 인상을 심으려 해 왔다. 전기나 언론매체를 통해 그가 정력적으로 눈코 뜰 새 없이 일에 열중한다는 것을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75년 3월 열흘간 3개 도·20여 개 단위의 6천리 길을 돌면서 현지 지도했다는 것이 과대선전의 예다. 또 60년대부터 92년 5월 중순까지 공장·기업·협동농장을 비롯해, 1천3백50여 곳이나 현지 지도했다는 선전도 있다. 2만km거리를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그가 대학시절(김일성 대학 정치경제학부 경제학과)부터 아버지 현지지도에 따라다니며 그 요령을 터득해 온 건 사실이다. 그러나 실물경제에 어두운데다 즉흥지시가 많아 국가계획사업에 종종 혼선을 빚는 일이 있다는 지적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80년대 들어 본격화된 경제적 효용가치가 없는「기념비적 대 건축물」을 짓는데 앞장선 게 그 예다.
그런가 하면 김정일은 북한주민들에게「호탕한」이미지를 심으려고 애써 왔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항상「통크다」는 소리를 듣게끔 스케일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스케일 큰 것-군중을 발동하는 운동 전·속도 전 방식을 펼쳐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을 좋아한다는 얘기다.
아버지가「사상 우선」과 천리마운동 같은「군중운동 우선」입장을 폈듯 아들도 사상전·운동 전을 강조하고 있다. 김정일이 내건 속도 전·70일 전투·2백일전투·3대혁명 붉은 기 쟁취운동 등은 모두 사회주의건설도「전투」하듯 하자는 것이다.
한편 김정일은 자신이「인정 많은 지도자」라는 것을 보이려고 애써 왔다. 이를 위해 정치적 상징조작이 수반됐다.
북한의 선전문에 따르면 북한 당국은 자상한 지도자로 김정일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고 요즘 연이어 각 기관 실무자·개인에게 감사 문 전달, 생일 상 차려 주기, 결혼선물 보내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생일 상 및 결혼 상을 차려 준 게 91년 한해만 4백80여명이었고 계속 느는 추세다. 일찍이 어머니를 잃은 가정체험이 묘하게도 개개인가정보다 사회전체를 하나의 가정으로 생각토록 촉발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는 집단주의 기치아래 북한사회를「혁명적 대 가정」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는 70년대에 당을 장악한 이래 수령을 전 인민의 아버지로, 당을 어머니로 받들도록 조치했다. 북한 주민들은「어버이수령」「어머니 당」이라는 말속에서 살고 있다.
김정일은 이것을 주체사상체계 속에 이론화했다.
북한사회를 수령-당, 대중이 삼위 일 체를 이루는 하나의 영생하는「사회 정치적 생명체」로 규정한 게 바로 그것이다.
김정일은 또 자신의 권력을 받쳐 주는 측근인사들의 의견을 비교적 잘 수용하는 편이라고 한다. 최근 북한의 대외경제개방 조치들은 김달현(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등 측근의 건의를 받아들인 결과라는 평가도 있다.
이밖에 김정일이 항상「새로운 것」에 집착, 과학기술·첨단분야에 관심이 크다는 지적도 있다.
전기에는 그가 황해제철소 전면자동화를 추진한 당사자인 것으로 돼 있다. 그가 선진과학기술의 도입과 공장설비 자동화에 일찍부터 눈을 돌렸다는 설명이다. 일부 증언으로▲사회안전 부 산하에 경제정보수집을 전담하는 정보총국 신설 및 공작원 세계도처 파견▲외국의 과학기술정보를 한곳에 집중시켜 3천명의 인력이 번역 작업하는「번역 사」설치▲77년부터의 영어공부 붐 조성 등의 장본인이 김정일이란 게 확인됐다.
그러나 김정일은 대중연설에 나선 적이 없는 여전히「수수께끼 인물」이다.
당 중앙위 간부협의회 등 당내의 소모임·실내행사에선 연설하기도 하지만 대규모행사나 옥의 집회에선 하지 않는다. 방송에서조차 그의 육성이 흘러 나가는 일이 거의 없다. 지난해 4월 25일 인민군창건 60주년 기념행사 열병식에서 그는『영웅적 조선인민군에 영광 있으 라』는 단 한마디만 소리쳤을 정도다. 그의 모든 담화·연설은 문장이 완전히 다듬어진 형태로만 발표되고 있다. 연설문은 방송원이 대독한다.
외부세계와의 유일한 인터뷰가 쿠바의『그란마』지(89년 10월 26일)와 한 것이었고 그것도 서면인터뷰였다.
얼마나 베일에 싸였으면 조총련계 잡지『조국』(92년 2월 호)에「양복 입은 김정일」사진이 실렸다고 해서 관심의 표적이 됐겠는가. 그가 외부인사와 빈번치 만나거나 공개석상에 본격 출현할 때 비로소 그의 자질과 능력이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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