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청장 없이 간 「의원외교」/문창극 워싱턴특파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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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금 미국 워싱턴에는 우리나라 국회의원 30여명이 몰려와 있다. 20일 열린 빌 클린턴 제42대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축하사절단 명목의 이들 의원들은 국회 외무통일위 정재문위원장을 비롯한 소속의원 10명과 정주영·권익현·손세일의원 등 여야의원 18명 등이다.
이들은 대통령 취임식 참석을 계기로 12년만에 들어선 민주당 새정부 인사들과 안면을 넓히고 친선을 도모하자는 의원 외교활동을 하고 있음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뜻이 그러할지라도 워싱턴의 현실은 한국의원들의 의원외교를 쉽사리 받아주지 않는 것 같다.
우선 이들중 누구도 공식초청을 받은바 없다. 미국은 대통령 취임식에 주재국 외교사절 이외는 외빈을 초청하지 않는 관례에 따라 이번 경우 현홍주 주미대사만을 공식 초청했다. 공식초청자가 아닌 경우 취임식과 각종 축하행사에 참석하려면 수백달러짜리 입장권을 구해야 한다.
주미대사관은 당초 외무통일위 소속의원 10명만 공식사절로 간주해 이들의 취임식 입장권만 구입했다가 무더기로 몰려온 의원들이 입장권을 구해달라고 성화하는 통에 업무에 지장을 받을 정도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남의 집 잔치를 기웃거리는 통에 애꿎은 사람만 피해를 보는 꼴이다.
또 새정부 출범을 맞은 미 의회·정부의 고위인사들이 우리 의원들을 만나줄만큼 여유가 없는게 현실이다. 외무통일위 의원들의 경우 토머스 폴리하원의장을 면담하려 했으나 스케줄이 꽉 차있어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보다 의원외교라는 말을 무색케 하는 것은 일부 의원들의 구시대적 행태다.
일부 의원들은 귀국후 선거구민들에게 미 대통령취임식 참석사실을 선전하려 사진찍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18일 아시아협회가 주최한 모임에 참석한 모당 의원단은 개리 애커먼 하원 아­태소위위원장과 사진을 찍기위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을 연출했다. 일부의 추태가 친선도모의 소박한 의도마저 흐트러뜨릴까 우려된다.
문민시대를 여는 길목에서 젊은 미국을 이끌어 나갈 클린턴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는 우리 의원들이 몸가짐에서부터 문민시대의 개막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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